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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도 대감집 노비"…간호사·공무원도 뛰어든 '무스펙 킹산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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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6년차 간호사 A씨는 지난 7일 현대자동차 기술직(생산직) 공개 채용에 원서를 넣었다. ‘힘들게 딴 간호 면허가 아깝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그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직장에 남고 싶진 않았다”고 말했다. 2년 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한 지방법원에서 근무하는 B씨도 퇴근 후 시간을 쪼개 현대차 생산직 자기소개서를 썼다. “연금이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직하겠다는 각오가 섰으니 빨리 나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무스펙’으로 돌아가도 좋아…간호사ㆍ공기업 직원도 합세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총 400명을 뽑는 이번 채용은 첫날부터 지원 서버가 마비될 정도로 큰 관심을 모았다. 1억원에 육박하는 평균 연봉(2021년 기준 9600만원)에 만 60세 정년 보장, 밤샘 근무 없는 주야 2교대에 대인 관계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적은 근무환경 등을 갖춘 일자리로 알려지며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선 ‘킹차 갓산직(현대차 생산직)’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현대차에선 경쟁률을 공개하지 않지만 업계에선 지원자 수가 18만명에 달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특히 경력·학력·성별 등의 제한도 없어 기존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각오로 지원한 사람들도 많았다. ‘일자리는 있지만, 좋은 일자리는 없다’는 청년층의 한탄과 직업 선호 기준의 변화가 ‘갓산직’ 열풍으로 표출됐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 수년간 쌓아 온 커리어를 버리고 갓산직 구직 대열에 합류한 이들은 현 직장의 열악한 근무환경에 염증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간호사 A씨는 “병원에서 간호사는 갈아 치우면 되는 소모품이다. ‘너 나가면 신규 뽑으면 된다’는 식이고 실제로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뽑는다”며 “의사와 달리 참고 견뎌서 연차가 쌓여도 크게 나아지는 게 없기 때문에 간호 면허는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차피 교대 근무를 할 거라면 조건도 좋고 페이도 좋은 곳에 다니는 게 낫다”고 말했다.

에너지 공기업에 다니는 양모(30)씨는 비생산적인 조직 문화를 생산직 지원 동기로 꼽았다. 그는 “보고서 글씨체 지적, 표 예쁘게 만들기, 발표 자료 꾸미기 등 보여주기식 보고와 조직 문화에 질렸다. 어차피 전공을 살릴 기회도 없고, 실적 때문에 없는 일까지 만들어 낸다. 몸이 고생하더라도 정신적 부담은 덜고 싶다”는 것이다.

“워라밸은 공무원? 현실의 공무원은 달라”

 2일 서울 서초구 aT센터에서 열린 '2023 대한민국 채용박람회'에서 구직자들이 현대자동차 채용설명회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2일 서울 서초구 aT센터에서 열린 '2023 대한민국 채용박람회'에서 구직자들이 현대자동차 채용설명회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생산직은 업무가 고된 반면 임금도 적다는 오랜 편견과 달리, 오히려 ‘워라밸’을 쫓아 지원한 사례도 많았다. 법원직 공무원 B씨는 “직업 선택에 있어 워라밸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공무원 시험을 쳤지만, 현실의 공무원은 달랐다”며 “연봉 인상률 1%대에 복지는 계속 축소되고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니다. 첫 월급이 아르바이트할 때보다 30만원 적었다. 당장 한 달 생활비에 쫓기지 않고 싶다”고 말했다.

이모(33)씨도 안정감을 쫓아 사회복지사를 택하고 7년 간 일했지만, 생각을 바꿨다. 그는 “노비도 대감집 노비가 좋다는 말이 있듯, 똑같이 고생하면서 일한다면 대기업에서 제대로 된 복지와 임금을 받으면서 일하고 싶다”며 “주변에서 임신 후 권고사직을 당하는 사례들을 많이 봤다. 오히려 현대차는 육아휴직이나 사내어린이집이 잘 돼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탈서울’을 꿈꾸며 이직을 택하기도 했다. 서울 강남의 한 광고대행사에서 일하는 이모(30)씨는 “서울은 주거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전세 재계약 때마다 주거환경이 딱히 더 좋지도 않은 집이 점점 더 비싸지더라”며 “일자리가 없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오게 된 경우라서 괜찮은 일자리만 있다면 지방에 가는 건 크게 상관없다”고 말했다.

2일 오후 4시 현대차 채용 홈페이지에 뜬 안내문. 사진 현대차 홈페이지

2일 오후 4시 현대차 채용 홈페이지에 뜬 안내문. 사진 현대차 홈페이지

“직업 선택도 실용적으로… 화이트·블루칼라 구분 옅어져”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MZ세대의 직업가치관이 화이트칼라를 선호하기보다는 봉급이나 작업환경을 고려하는 실용적 성향으로 바뀌고 있다. 실제 현장에서도 기술 발달로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구분이 옅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통계청 사회조사에 따르면 20대의 ‘직업 선택 요인’에서 ‘수입’이 차지하는 비율은 2015년 32.4%에서 2021년 34.1%로 늘었고 ‘안정성’은 26.5%에서 22.5%로 줄었다. ‘적성ㆍ흥미’라는 답변도 24.5%에서 20.6%로 6년새 3.9%포인트 줄었다.

대규모 공채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도 요인 중 하나다. 이호근 대덕대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코로나19로 인한 차량 생산 차질 때문에 생산직 근로자에 대한 채용이 없었다. 게다가 앞으로는 전동화로 인원을 점차 감축할 거란 예상이 나온다”며 “‘우리 생의 마지막 생산직 근로자 확대’일수 있다는 걸 지원자들이 감으로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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