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현기의 시시각각] 윤 대통령 방일 전날에 바란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강제징용 정치적 승리 포장은 곤란
추가조치 얻는데 연연할 필요 있나
때론 과거는 지나가게 내버려둬야

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1 WBC 한일전과 강제징용 해결책의 공통점 세 가지.

첫째, 드러난 결과는 콜드게임 패에 가까웠다. 실력 차가 있었다. 일본은 홈경기 내내 동요가 없었다.

시합 전 한국 선수가 "던질 곳이 없다면 (오타니 선수를) 안 아픈 데 맞혀야죠"라고 약세, 조급증을 보인 순간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강제징용 협상도 그랬다.

상대방은 숙성회를 먹는 일본인데, 한국은 활어회를 먹으려고 서둘렀다. '협상 시한'을 내부적으로 못 박은 순간 게임은 확 기울었다.

둘째,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선수들의 몸은 무거웠고, 끝까지 뛰려고도 하지 않았다.

협상도 그랬다. 국장급에 몇 번의 차관·장관급 만남으로 끝냈다. 막판 특사도 없었다.

이게 뭘 뜻하는지 일본이 놓칠 리 만무했다.

지난 10일 오후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B조 본선 1라운드 한국과 일본의 경기. 13-4로 패배한 우리나라 대표팀 선수들이 굳은 표정으로 그라운드로 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0일 오후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B조 본선 1라운드 한국과 일본의 경기. 13-4로 패배한 우리나라 대표팀 선수들이 굳은 표정으로 그라운드로 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마지막은 결과에 대한 평가.

야구 전문가나 외교 전문가들은 "어쩔 수 없었다" "대승적 결단"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반 국민은 "역사상 최대의 참패" "잘못된 협상"(59%, 긍정 평가는 35%)이라고 한다. 미묘한 괴리다.

윤석열 대통령도, 이강철 감독도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고 한다. 하지만 뭘 어떻게 진다는 말은 없다.

#2 외교 격언에 "외교란 '51 대 49'의 결과를 만들어 모두 자신이 (49가 아닌) 51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란 게 있다.

협상에 참여하는 누구든 자신이 조금 이겼다고 생각하게끔 하는 게 최선의 협상이란 이야기다.

2015년 12월 위안부 합의 직후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은 "우리가 51 대 49로 이겼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건 잘 된 협상이었다.

이번에도 똑같이 물었다. 유 전 장관의 답은 의외였다.

"이번에는 애당초 그런 점수가 성립이 안 된다"고 했다.

청구권 협정으로 강제징용 문제는 끝났다는 우리 정부 입장을 문재인 정부 시절 우리 사법부가 뒤집어놓았는데, 제대로 밀고 당기기가 됐겠느냐는 설명이다. 일리 있는 얘기다.

다만 그렇다 해도 우리가 얻은 게 51은 안 된다는 것 또한 객관적 사실이 아닐까. 인정할 건 인정하자.

그러니 마치 우리가 이 문제를 주도했다거나, 정치적 승리를 거뒀다거나, 유엔도 EU도 우리 결정을 환영했다거나 하는 '오버'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힘든 결정이긴 했겠지만, 당초 의도한 결과 또한 아니지 않나.

젖은 내복을 입고 있는 듯한 찝찝함을 꾹 참고 있는 희생자, 국민도 많다. 지금은 무조건 낮게 임하며 겸허한 자세를 보일 때다.

지난해 11월 13일 윤석열 대통령(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캄보디아 프놈펜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지난해 11월 13일 윤석열 대통령(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캄보디아 프놈펜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3 윤석열 대통령이 내일 일본을 찾는다. 모두가 일본의 '성의 있는 추가 조치'에 주목한다.

기시다 총리가 직접 '오와비(사죄)'란 단어를 쓸지, 한·일 재계가 마련하는 미래기금에 피고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 일본제철이 직접 참여하는지가 관심사다.

하지만 난 거기에 너무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애초부터 '물컵 절반'이 일본의 선의에 의해 추가로 채워질 것이라 보지도 않았거니와, 미래기금을 만든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마음이 달래질 일도 아니다.

좋든 싫든, 이겼든 졌든 이미 협상은 끝났다. '개평'을 달라고 떼쓰는 것처럼 보일 필요 없다. 초라해질 뿐이다.

중요한 건 어렵게 마련된 이 판을 깨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그게 훨씬 현실적이다.

2015년 12월 위안부 합의 직후에도 기시다 당시 일 외상은 "잃은 것은 10억 엔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아베 총리는 "(한국에 대한 추가적 조치를) 털끝만큼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말해 분노를 샀다.

그런 얼굴 붉힐 일이 재연되지 않도록 윤 대통령은 기시다 총리에게 단단히 못을 박아야 한다.

윤 대통령 방일 이틀 전인 14일 도쿄는 벚꽃이 개화했다. 이렇게 빨리 피는 건 1953년 이래 처음이라고 한다.

도쿄 도심에 벚꽃이 피어있는 모습. 일본 기상청은 올해 도쿄의 벚꽃 개화가 예년보다 열흘 가량 이른 16일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도쿄 도심에 벚꽃이 피어있는 모습. 일본 기상청은 올해 도쿄의 벚꽃 개화가 예년보다 열흘 가량 이른 16일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한·일도 부디 과거에서 미래로 무게추를 옮기는, 새로운 꽃씨를 심는 전환점이 되길 고대한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배워야 하지만 때로는 과거는 지나가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

헤리티지 재단 창설자 에드윈 퓰너가 수년 전 들려준 말이다. 요즘 부쩍 이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