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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강명의 마음 읽기

AI 시대 소설의 미래, 우울한 버전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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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우울증 환자들이 우울증에 걸리지 않은 사람보다 주변 세상을 더 정확하게 본다’는 말을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챗GPT에게 물어보니 엘리자베스 워첼의 『프로작 네이션』에 처음 나온 말이라고 한다. 내가 기억을 더듬어 “그거 혹시 앤드루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에서 먼저 나온 얘기 아니야?” 하고 다시 물어봤더니 자기가 틀렸고 내 말이 맞는단다. 죄송하단다.

그런데 검색을 해보니 『프로작 네이션』이 『한낮의 우울』보다 더 일찍 출간됐다. 다시 물어보니 이제는 그 얘기가 『한낮의 우울』에는 나왔고, 『프로작 네이션』에는 아예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제 이 녀석 얘기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결국 책장을 한참 뒤져서 『한낮의 우울』 번역본 개정판 기준으로 713~714쪽에 그 얘기가 나오는 것은 확인했다. 『프로작 네이션』은 집에 없어서 모르겠다.

인공지능과 협업 피할 수 없을 때
인간은 예술 감독에 머물게 될까
‘야생’의 생태계, 그 두려운 상상

마음 읽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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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의 대답을 실망스럽다고 해야 할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인공지능에 대한 원고를 쓰면서 첫 문장을 우울증으로 시작한 이유는 따로 있다. 최근 한 달 사이에 엄청나게 쏟아진 ‘챗GPT 충격’ 관련 칼럼들을 참고삼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말 우리가 미래를 낙관해도 되는 거 맞아? 지금 우울하게 예상하는 사람이 가장 정확한 것 아니야?

많은 칼럼의 필자들이 입을 모아 인공지능이 세상을 엄청나게 바꿔놓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최근 인공지능의 결과물들에는 평가가 묘하게 인색했다. 인공지능이 쓴 시, 인공지능이 그린 그림에는 인간 창작자만이 담을 수 있는 ‘뭔가’가 없다고 했다. 그 ‘뭔가’는 지혜나 통찰, 깊은 맛, 진정성, 자기 서사, 뭐 그런 것인 듯했다. 인간의 그림과 인공지능의 그림을 블라인드 테스트로 구분할 수 있을지, 솔직히 나는 자신 없는데.

그 칼럼들의 결론은 여러 갈래였다. 인공지능은 결코 할 수 없고 인간만이 이를 수 있는 그 ‘뭔가’에 인간이 집중하면 된다, 앞으로 교육도 그런 방향에 초점을 둬야 한다는 얘기가 있었다. 기술 자체는 중립적인 것이니 인공지능을 윤리적으로 유용하게 잘 쓸 수 있는 방안을 찾자는 얘기도 있었다. 인공지능이 파괴적인 기술이니 개발에 대한 규제나 관리, 가이드라인을 도입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속한 업계에서 인공지능이 일으킬 변화를 예상하며 자꾸 우울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인공지능은 이미 어설프게나마 소설을 쓴다. 엄청나게 탁월하지는 않더라도, 그럭저럭 소설을 쓰는 인공지능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그리고 그런 날이 오면 그럭저럭 수준인 소설을 쓰는 인간 소설가들은 어마어마하게 큰 타격을 입지 않을까. 인간 소설가들은 그런 작품을 쓰는 데에도 몇 달에서 몇 년이 걸리는데, 인공지능은 비슷한 수준의 결과물을 하루에도 몇십 편씩 뚝딱뚝딱 내놓을 테니 말이다. 인간이 쓴 소설은 턱없이 비싼 수공예품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집필하는 인공지능을 개발하면 안 된다는 규제를 도입할 수 있을까? 그럴 타이밍은 이미 놓친 것 아닌가. 인공지능을 이용해 대중소설 시리즈를 제작해 판매하려는 출판사를 막을 방법이 있을까? 인공지능이 쓴 원고를 출판사 대표가 “내가 썼다”거나 “본인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얼굴 없는 작가’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면 압수수색이라도 해서 진위를 밝혀야 하나? ‘인공지능이 쓴 소설은 읽지 않는 것이 윤리적인 독서’라고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탁월한 수준의 작품을 써내는 작가들이라고 안심할 수는 없다. 인공지능이 흉내 낼 수 없는 탁월성이 어떤 부분인지 드러나게 될 테다. 그러면 탁월한 작가는 바로 그 탁월한 부분에만 집중하고, 나머지 부분은 인공지능이 맡아 하는 분업이 이뤄질 것 같다. 뛰어난 인간 소설가가 플롯을 짜고 문장은 인공지능이 쓴다든가, 아니면 반대로 인공지능이 쓴 글의 문장을 인간 소설가가 다듬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새롭고 효율적인 소설 생산 방식에서 인간 작가의 위치는 프로듀서나 예술 감독 정도로 축소된다.

아마 이런 예상은 들어맞지 않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내가 하는 예상이건, 다른 이들이 펼친 예상이건, 모두 들어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과학기술 잡지 와이어드의 초대 편집장 케빈 켈리가 거의 30년 전에 사용했던 표현들을 빌리고 고쳐서 써본다. ‘태어난 것과 만들어진 것이 섞여 생태계를 이루고, 거기에서 새로운 야생이 태어날 것이다.’ 그 야생의 생태계가 어떤 모습일지 우리는 모른다.

어쩌면 모두가 걱정하는 인간의 일자리는 인공지능 시대에도 끝까지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다들 그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여기니까. 그리고 우리는 일자리를 지키는 대신 개인, 예술, 의미 같은 개념을 잃게 될지도 모르겠다. 뭔가가 무너지기는 할 것 같다.

장강명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