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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역지사지

스즈메의 문단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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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유성운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유성운 문화부 기자

유성운 문화부 기자

2007년 뮤지컬 ‘스위니 토드’가 한국에서 첫 공연을 했을 때다. 연출가인 캐나다 출신의 애드리언 오스먼드를 인터뷰했다. ‘스위니 토드’는 런던의 이발사가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잔혹극이다. 면도칼로 목을 벨 때 피가 솟구치는 장면이 꽤 수위가 높았다. 오스먼드 연출은 “브로드웨이에서는 목에 빨간 선만 긋는데, 이 정도로는 한국 관객을 만족하게 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피를 뿜어지는 장치를 고안했다”고 말했다.

스즈메의 문단속

스즈메의 문단속

무슨 말일까? 의아했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 한국에 오기 전 관객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한국 영화를 추천받아 봤는데, ‘브로드웨이의 잔혹극 수준으로는 한국에서 통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무슨 영화를 봤냐고 물었더니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 ‘복수는 나의 것’ 등을 꼽았다.

‘더 글로리’가 신드롬에 가까운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학폭·복수 등의 코드로 짜임새 있게 엮어 호평을 받는 이 작품은 넷플릭스 TV 프로그램에서도 1위에 올랐다. ‘더 글로리’를 포함해 ‘오징어 게임’ ‘킹덤’ ‘지금 우리 학교는’ 등 넷플릭스에서 호평받은 작품은 대개 잔혹, 좀비, 복수, 불공평한 사회 등 뒤틀린 설정을 통해 이야기를 촘촘하게 엮었다. 지난 주말 일본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을 관람했다. 동일본대지진 등 일본을 뒤덮은 재난에 대한 치유와 일상의 소중함을 탄탄하게 풀어내는 과정이 2시간 동안 펼쳐졌다. 한국 대중문화에서 이 소재를 다룬다면 어땠을까. 무능한 공권력, 억울한 피해자, 복수 등으로 엮어가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