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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감독 없는 K야구…3만8900㎞ 이동에 힘 다 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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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WBC 1라운드에서 탈락해 14일 인천공항을 통해 조기 귀국한 야구 대표팀 선수들. 한국 야구가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전임감독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게 야구계의 중론이다. [연합뉴스]

WBC 1라운드에서 탈락해 14일 인천공항을 통해 조기 귀국한 야구 대표팀 선수들. 한국 야구가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전임감독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게 야구계의 중론이다. [연합뉴스]

K리그 프로축구팀 감독이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국가대표 감독직을 겸임한다. 감독은 소속팀과 대표팀 훈련을 함께 이끌어야 할 입장이다. 그래서 대표팀 훈련 캠프를 소속팀 훈련지인 튀르키예에 차린다. 2주 정도 훈련을 한 뒤 아르헨티나로 이동해 연습 경기를 하고, 대회 개막 닷새를 앞두고 결전지인 브라질에 입성한다.

브라질에서 월드컵이 열리는데 튀르키예에 훈련 캠프를 차리다니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가상의 시나리오이긴 하지만, 축구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개막을 앞두고 한국 야구 대표팀에선 이런 일이 일어났다. 장소는 다르지만, 비유하자면 꼭 이런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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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인터뷰에서 “죄송하다”며 고개 숙인 이강철 대표팀 감독.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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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대표팀 선수들은 2월 1일 소속팀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2월 15일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에 모였다. 2주 정도 훈련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고척돔에서 연습경기를 했다. 그리고는 3월 4일 일본 오사카로 날아갔다. 6, 7일 일본 프로팀과 연습경기를 가진 뒤 9일에 도쿄에서 호주전을 치렀다.

특히 소속팀 두산 베어스의 캠프인 호주 시드니에서 훈련했던 양의지는 WBC 개막을 앞두고 시드니→서울→애리조나 투손→LA→서울→오사카→도쿄로 옮겨 다녔다. 대표팀 소집 초반에 컨디션이 나빴던 게 당연하다. 시차 적응이 안 돼 서서 졸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난 이유는 단 하나다. 프로야구 KT 위즈 이강철 감독이 대표팀 감독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KT는 지난 2월 애리조나에서 전지훈련을 했다. KT 뿐만이 아니라 키움·LG·KIA·NC·한화 등 총 6개 팀이 이곳에 스프링캠프를 차렸다. 그래서 대표팀 캠프도 미국에 꾸리자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애리조나 투손의 날씨는 궂은 날이 많았다. 연습 경기가 취소되는가 하면 이동 중 비행기 고장 문제까지 발생하면서 일이 꼬였다.

투수들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선수 기용에 어려움을 겪은 이강철 감독(오른쪽).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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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C 대표팀이 1라운드에서 탈락한 첫 번째 이유는 실력이다. 2006년 WBC에 출전한 야구 대표팀엔 해외파 선수가 8명(박찬호·구대성·김병현·서재응·봉중근·김선우·최희섭·이승엽)이나 됐다. 이번 대표팀엔 김하성과 토미 현수 에드먼, 2명뿐이었다. 하지만 호주도 못 이길 정도의 전력은 아니었다. 4년 전 프리미어12에선 메이저리거가 한 명도 없었는데도 호주에 5-0 완승을 거뒀다. 한국이나 호주나 엔트리가 크게 바뀌진 않았다.

그때와 다른 건 몸 상태의 차이다. 프리미어12는 KBO리그가 끝난 뒤 한국에서 1라운드 경기를 치렀다. 한국 선수들은 시즌이 끝난 뒤라 경기 감각이 살아있었다. 이번엔 반대의 경우다. 호주 대표팀은 시즌이 끝난 2월, 일본에 모여 전지훈련을 했다. 경기 감각이 좋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 선수들, 특히 투수 중 상당수는 몸 상태가 안 좋아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고우석은 공을 1개도 못 던졌다. 양준혁 해설위원은 “따뜻한 오키나와나 후쿠오카에서 훈련했다면 몸 상태가 이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다시 대표팀 전임감독제를 도입하자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는다. 프로팀과 대표팀 감독을 병행하는 게 아니라 대표팀만 전담하는 전임감독이었다면 일본에서 대표팀 훈련을 진행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이후 야구대표팀은 전년도 우승팀 감독이나 경험이 많은 지도자가 지휘봉을 잡았다. 그러나 안방에서 열린 2017 WBC에서 1라운드 탈락한 이후 전임감독제를 도입했다. 그 결과 선동열 감독과 김경문 감독이 전임감독으로 대표팀을 이끌었다.

양의지

양의지

그러나 전임감독제는 5년 만에 사라졌다. 일부 국회의원은 2018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이 금메달을 땄는데도 선동열 감독을 국정감사에 불러내 망신을 줬다. 그리고 2021년 도쿄올림픽에서 한국이 노메달에 그치자 이듬해인 2022년부터 전임감독제를 폐지했다. 연봉(2억~3억원)에 비해 대표팀 전임감독의 역할이 크지 않다는 논리였다.

야구대표팀 양의지의 이동 경로

1월 19일 서울→시드니 : 약 8300㎞
2월 1일 두산 훈련 합류
2월 12일 시드니→서울 : 8300㎞
2월 14일 서울→LA→투손 : 10400㎞
2월 27일 투손→LA→서울 : 10400㎞
3월 4일 인천→오사카 : 900㎞
3월 7일 오사카→도쿄 : 600㎞(기차 이동)
총 이동거리 : 약 38900 ㎞

결국 올해 WBC에선 이강철 KT 감독이 대표팀 감독을 겸임했다. 일부에선 A매치만 1년에 10경기 이상 치르는 축구와 달리 야구는 국제 대회가 적어 전임감독이 필요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올해만 해도 10월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이어 아시아 프로야구챔피언십(APBC·11월)이 열릴 예정이다. 내년엔 프리미어12가 개최되고, 3년 뒤엔 다시 WBC가 열린다. 올림픽에선 2008 베이징 대회를 마지막으로 야구가 ‘핵심 종목’에서 빠졌다. 그래서 2024 파리올림픽에선 야구가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2028년 LA올림픽에선 개최국 권한으로 야구가 포함될 가능성이 크다.

2015년부터 전임감독제를 도입한 일본은 매년 호주·대만·멕시코 등과 평가전을 연다. 이순철 해설위원은 “일본과의 교류전이라든지 다른 나라 팀과의 친선 경기를 자주 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 야구가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선수들의 실력을 키우는 한편 체계적인 대표팀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필수적이다. 전임감독제가 그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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