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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기계가 시간 재는 피셔 방식, 빨라진 대국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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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검은 돌 흰 돌

검은 돌 흰 돌

바둑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제한시간이 있고 그게 끝나면 초읽기를 한다. 초읽기는 상대하기 힘든 존재다. AI가 95% 우세라고 판정한 바둑도 초읽기에 걸리면 순식간에 뒤집히곤 한다.

1분 초읽기는 “30초, 40초, 50초, 하나, 둘, 셋...아홉”하고 센다. “열” 소리가 나면 시간패다. 20초 초읽기는 숨 돌릴 새가 없다. 그 압박감을 이용해 시간공격이란 전술이 등장했고 시간연장이란 수법도 등장했다. 시간은 승부를 좌우하는 귀중하고 무서운 존재가 됐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뼛속 깊은 애착은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단수라서 바로 두어야 할 상황인데 59초가 되기 전에는 두지 않는다. 이런 장면은 보는 사람에겐 재미도 없고 피곤하다.

국내 바둑의 핵심 무대이자 가장 큰 기전인 KB바둑리그가 올해 ‘피셔 방식’이란 독특한 시간제를 채택해 화제다. 피셔 방식은 체스에서 빌려온 것으로 그동안 한두 기전에서 사용했지만 바둑리그에서는 처음이다.

피셔 방식은 바둑을 빨리 두면 시간이 늘어난다. 바둑리그의 속기는 제한시간 20분. 여기에 +20초라는 피셔 방식을 가미했다. +20초는 산수가 필요하다. 가령 첫수를 두는 데 5초가 걸렸다면 남은 시간은 20분-5초+20초=20분 15초가 된다. 이런 식으로 계속 시간을 늘릴 수 있다. 마지막 1초가 남았을 때 착수하면 남은 시간은 21초. 다시 1초 만에 착수하면 남은 시간은 40초가 된다. 선수들은 초반에 빨리 두어 시간을 저축한다. 중반의 승부처에 대비한다.

피셔 방식에 대해 선수들은 어떤 생각일까. 여자 최강자 최정 9단은 “찬성이다. 대국 시간을 거의 정확히 예측할 수 있고 빨리 두면 자기 시간을 축적할 수 있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세계최강의 실력자 신진서 9단은 좀 더 적극적이다.

“피셔 방식은 경솔한 실수를 유발할 수 있지만 바둑의 재미를 생각할 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수인데도 시간을 꽉 채워서 두는 것은 재미를 떨어뜨린다. 그걸 자연스레 없앤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신진서는 ‘재미’를 강조한다. 사실 재미는 바둑이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프로들은 어려서 도장에서 배울 때부터 시간 훈련을 받아왔다. 초읽기에 몰렸을 때 단수라고 해도 바로 두면 혼난다. 58초나 59초가 돼서야 둔다. 30초 바둑은 29초에 두고 10초 바둑은 9초에 둔다. 이게 몸에 배 습관이 됐다. 두는 사람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만 보는 사람은 재미가 없다. 대국 시간도 자꾸 늘어난다. 이건 참으로 오래되고 신경 쓰이는 문제였는데 그 문제를 피셔 방식이 해결하고 있다.

한데 묘한 일이 벌어졌다. 피셔 방식은 계시원이 수행할 수 없다. 순식간에 시간을 더하고 빼야 하니까 오직 기계만이 가능하다. 그래서 지난해까지 계시원이 맡던 일을 올해부터 기계가 맡게 됐다. 착수를 하면 선수가 직접 시계를 눌러야 한다. 이 바람에 시간패가 갑자기 늘어났다.

계시원은 초를 읽을 때는 인정상 차마 “열”을 부르지 못했다. “아홉”이 길어졌다. 어떤 프로들은 그걸 알고 아홉에도 느긋했다. 기계는 다르다. 가차 없이 “열”을 부른다. KB바둑리그는 처음 두 달간 183판에서 무려 19판이 시간패로 끝났다. 10%가 넘는다.

KB바둑리그 의정부팀 감독인 김영삼 9단은 “피셔 방식은 찬성이다. 대국 스피드가 빨라졌다. 하나 신진서 9단 같은 젊은 강자들에겐 좋고 이창호 9단 같은 노장들에겐 괴로운 룰인 것 같다”라고 말한다. KB바둑리그 해설을 맡고 있는 유창혁 9단도 찬성이다. “피셔 방식으로 시간 끌기가 없어졌다. 대국도 박진감이 있어 보는 사람이 재미있어졌다. 다만 시간 관리가 힘들어졌다. 시간패도 많아졌다”고 말한다.

프로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피셔 방식이 앞으로 많은 프로기전에 퍼질 것 같은 예감이다. 바둑이 더욱 빨라진다는 얘기다.

박치문 바둑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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