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북한이 제일 그리워하는 중국 지도자는?

중앙일보

입력

저우언라이. 사진 중앙일보

저우언라이. 사진 중앙일보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유엔 대북 제재에 코로나19까지 겹쳐 아사자가 속출할 정도로 식량난이 특히 시급하다. 중국이 북한에 지원을 하긴 하지만 굶어 죽지 않을 정도니 언 발에 오줌 누기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국내외 사정으로 북한을 화끈하게 지원할 수 없는 사정이다.

북한이 제일 그리워하는 중국 지도자는 저우언라이다. 북한 외무성은 지난해 4월 14일부터 18일까지 홈페이지에 ‘조중친선의 갈피를 더듬어’라는 제목으로 시리즈를 게재했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4월 15일자 ‘수령님과 주은래’다. 마오쩌둥‧덩샤오핑‧장쩌민이 아니라 저우언라이였다. 왜일까? 북한은 그가 중국 지도자 가운데 북‧중 관계를 가장 원활하게 만든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브레즈네프와 저우언라이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냉전 시절 북한에 대한 원조의 양은 소련이 많았다. 브레즈네프는 “우리가 이만큼 도움을 많이 주지 않았느냐”며 생색내고 툴툴거렸던 반면 저우언라이는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라”고 말했다. 저우언라이의 이런 태도가 북한 사람들에게 감흥을 준 것이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에서 저우언라이를 이렇게 기억했다. 황 비서는 “저우언라이가 우리 같은 사람하고도 얘기하고, 조선(북한)에 관해서 무엇인가 배우고자 했다”고 적었다. 황 비서는 1960년 중국에서 저우언라이를 만났다. 그때 저우언라이가 “조선말로 된 것이라도 좋으니 조선 역사책을 보내달라”고 했다. 황 비서는 귀국해 책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황 비서는 “마오쩌둥‧김일성‧저우언라이가 주탁(主卓)에 앉을 때도 계속 말하고 웃기는 건 저우언라이”라고 회고했다.

북한 외무성은 김일성이 저우언라이를 ‘잊을 수 없는 혁명동지, 고락을 같이 한 친근한 전우, 가장 가까운 친형제로 생각한다’고 적었다. 그런 이유로 김일성은 1979년 5월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흥남비료공장에 저우언라이 반신 동상(2.4m)을 세웠다. 외국인으로 북한에 동상이 세워진 것은 저우언라이가 유일하다. 나이로는 저우언라이가 김일성보다 14살이 많다.

평양이 아니라 함흥에 세워진 이유는 이렇다. 저우언라이는 1958년 2월 처음 북한을 방문했다. 북한에 주둔하고 있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를 논의하기 위해서다. 동행한 사람은 천이 외교부장‧쑤위 총참모장‧장원톈 외교부 부부장 등이다. 그들은 평양을 방문한 김에 함흥‧원산 등도 방문했다.

그 가운데 북한 최대 비료공장인 흥남비료공장(현 흥남비료연합기업소)을 방문했다. 이 공장은 한국전쟁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을 위해 폭약을 생산했던 곳이다. 저우언라이는 흥남비료공장의 지원에 감사하기 위해 그곳을 찾은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중조 우의 만고장청(萬古長靑)’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그때 동행한 김일성은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저우언라이가 1976년 사망하자 흥남비료공장에서 연설했던 장소에 연설 모습을 재현한 반신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3년 뒤 1979년 5월 제막식을 열고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를 초청했다.

김일성이 저우언라이에게 남다른 애정을 갖는 또 다른 장면이 있다. 김일성이 1964년 9월 중국 하얼빈을 방문했을 때다. 북한은 당시 몸이 불편했던 저우언라이가 베이징에서 하얼빈까지 찾아와 김일성을 만났다고 선전했다. 북한 외무성은 그때 상황에 대해 “위대한 수령님이 이런 주은래 총리를 진심으로 존대하고 뜨거운 우정과 숭고한 의리로 대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주은래가 불치의 병을 앓고 있을 때(1975년 4월) 수령님이 찾아가시어 따뜻이 위로했다”고 덧붙였다.

김일성과 저우언라이는 언제 처음 만났을까?

항일 기간 저우언라이는 주로 우한과 충칭에서 활동했고 김일성은 동북과 소련에서 지냈다. 저우언라이는 당시 동북항일연군에서 활약하는 김일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1971년 5월 방중한 평양시 배드민턴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항일전쟁 때 김일성 수상이 직접 참가해 동북에서 투쟁하면서 일본군을 견제하고 우리를 지원했다”고 기억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저우언라이는 제2차 국공내전, 김일성은 북한 건설로 만나지 못했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950년 5월 13일로 추정된다. 김일성이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으로부터 남침에 대한 승인을 받고 귀국했다. 그리고 5월 13일 베이징을 방문했다. 북한 외무성은 당시 상황을 “주은래 총리가 수령님을 첫 상봉했을 때 너무도 젊은 청년 장군이라 무척 놀랐다”고 밝혔다.

저우언라이는 1958년 2월 북한을 처음 방문한 이후 3차례 더 북한을 찾았다. 1962년 10월, 1970년 4월, 1972년 3월이다. 저우언라이는 모두 4차례 방북한 셈이다. 북한 사람들이 저우언라이의 방북 가운데 가장 기억하는 것은 1962년 10월이다. 바로 북‧중 국경조약의 체결 때문이다. 그 조약을 토대로 1964년 3월 ‘중조변계의정서’를 체결해 국경선을 최종 획정했다.

저우언라이는 예상과 달리 북한에 유리하게 국경을 획정했다. 한국전쟁 당시 파병해 준 대가로 북한이 대폭 양보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백두산 천지의 54.5%는 북한이, 45.5%는 중국이 차지했다. 백두산 일대 경계는 서쪽의 경우 천지를 나누는 경계선의 서남쪽 기점에서 압록강 상류로 이어졌다. 동쪽으로는 천지의 동북쪽 기점에서 두만강 상류를 연결하는 선으로 국경선을 삼았다.

중요한 것은 백두산정계비를 경계선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백두산정계비는 천지에서 동남쪽으로 4km 지점에 있다. 만약 이를 경계선으로 했더라면 북한에 매우 불리했을 텐데 중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압록강과 두만강의 섬과 사주(沙洲)도 마찬가지다. 압록강의 경우 섬과 사주 205개 가운데 북한이 127개, 중국이 78개를 가졌다. 두만강은 246개 가운데 북한이 137개, 중국이 109개를 소유했다. 이처럼 북‧중 국경 획정은 북한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이고 순탄하게 진행했다.

중국이 국경 문제와 관련해 소련‧인도‧베트남과는 무력 충돌까지 불사했는데, 왜일까? 당시 중소 갈등 고조와 북‧러 관계가 불편했다. 중국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인도와 국경분쟁이 전쟁으로 비화하는 시기였으며 이에 따라 중소 분쟁이 격화됐다. 따라서 중국은 북한의 지지가 필요했다. 북한은 소련의 평화공존노선과 개인 숭배 반대로 소련과 불편했다.

자연스레 북‧중 관계는 강화됐다. 북한의 지지가 필요한 저우언라이가 이런 이유로 북한에 유리한 국경조약을 맺지 않았을까? 저우언라이는 북한에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불행하게도 저우언라이처럼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

.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