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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디지털 시대, 반도체 국영기업의 등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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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재민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재민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정부가 돈을 댄다. 영업을 감독하고 시설 점검에 나선다. 회계 장부를 들여다보며, 생산 품목과 투자 방향도 통제한다. 사업으로 이익이 나면 거둬간다. 바로 넓은 의미의 국영기업이다. 미국이 이를 계획하고 있다. 그것도 디지털 시대의 총아 반도체 산업이다. 2월 28일 미국 상무부 반도체지원법 이행 계획은 이런 내용을 내놓았다. 여러 국가와 기업들이 큰 혼란에 빠졌다.

보조금을 주며 그간 보지 못한 여러 조건을 달았다. 먼저 미국 정부기관에 반도체 생산 시설을 열어 줘야 한다. 회계 자료도 제공하고 일정 한도를 넘는 이익은 미국 정부에 납부한다. 중국 투자는 10년간 금지된다. 요컨대 회사 사업 밑천인 시설과 자료를 공유하고, 버는 돈에도 상한선을 둔다는 것이다. 여러 나라를 통틀어 보조금 수혜 요건으론 전례가 없다.

사실 이 정도면 ‘보조금’이라 부를 수도 없다. 원래 보조금이란 무상으로 지원하는 돈이다. 여러 조건을 붙이면 통상협정상 보조금에 해당하지 않는다. 100만원 주고 200만원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상황을 떠올리면 된다. 지금 내건 조건들의 금전적 부담을 계산하면 아마 아무리 좋게 잡아도 지원금과 득실이 비슷할 것이다.

미, 전례없는 반도체 보조금 조건
시장 경쟁 및 연구 개발 저해하고
공급망 재편 계획에도 되레 역행
양국 최우선 과제로 접점 찾아야

이번에 책정된 보조금 총액이 390억 달러(약 50조원)다. 이를 우리 기업에 전부 준대도 우리 기업의 그간 중국 설비투자 금액 58조원과 비슷하다. 10년 투자 금지면 58조원짜리 중국 생산설비가 오갈 데 없게 된다. 여기에 다른 조건의 금전적 부담을 더하면 반대급부는 더 늘어난다. 결국 보조금으로 보기 힘든 ‘무늬만 보조금’으로 기업을 옥죄고 있다.

이 계획이면 통상협정 여러 조항에 걸린다. 그러나 지금 단계에선 큰 의미가 없다. 아마 미국은 국가안보 사안으로 문제없다는 입장으로 맞설 것이다. 지난 28일 발표에도 국가안보 언급이 여러 번 나왔다.

우리로선 이 계획이 왜 미국이 구상하는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역행하는지 설득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쪽저쪽 중 하나를 선택해 사업하라는 게 공급망 재편이라면 지금 계획은 그 취지에도 안 맞는다. 이쪽으로 오겠다는 기업에 환영 대신 시련을 안기겠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면 반도체 회사들의 정상적인 연구개발과 영업활동이 어렵다. 정부기관과 함께 반도체를 만들고 공장을 운영하는데 혁신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지금 계획은 공급망 재편이 아닌 공급망 힘 빼기에 가깝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공급망 고사(枯死)로 이어질 것이다. 미국의 기본 구상에 반하는 결과다.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미국도 정말 다급하다. 좀 더 현실적인 대안은 없을까. 먼저 생산시설 접근은 현실성도 실익도 없다. 미국 정부기관 담당자가 과연 복잡한 반도체 시설을 이해하고 연구개발 과정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나. 아마 민간 전문가 도움과 자문이 어떻게든 필요하리라. 이러다 기업 기밀이 샐 수 있다.

생산시설을 보려는 건 제조 과정과 품목에 행여 미국 국가안보에 저해되는 요소가 있는지 우려하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미국 내 시설 운영책임자 및 담당자가 정기적으로 서약서와 확인서를 제출하는 대안도 생각할 수 있다. 해당 시설이 반도체지원법 조건에 따라 운영되고 있음을 미국 정부에 확인하는 것이다. 만약 추후에라도 위반 사실이 발견되면 이자까지 쳐 지원금을 반납한다.

이에 더해 정부 지원금 부당 사용에 적용되는 미국 국내법은 이미 겹겹이 있다. ‘부당수급법(False Claims Act)’은 기업이 허위 문서 제출로 지원금을 타가면 피해액의 세 배를 물게 하고, ‘연방정부기망법(Major Fraud Act)’은 관련 담당자를 10년 이하 징역으로 처벌한다. 기업에 이보다 강력한 제재가 있을까. 기업에 대한 법령 준수 감시는 미국법에선 대부분 이런 방식이다. 현실적이다. 반도체라고 달리 볼 이유는 딱히 없다.

초과이익 공유도 꼭 필요하다면 정교하게 다듬어야 한다. 실적 좋은 해와 나쁜 해를 합쳐 계산하고, 경기 변동을 반영한 중간 조정 절차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5년, 10년 등 반도체 산업 사이클에 맞춘 평가가 되어야 한다.

중국 투자 제한은 ‘신규 투자’에만 적용되도록 명확히 해야 한다. 기존 시설의 관리·유지·보수는 빠진다. 시장 경쟁에 변동을 초래하지 않는 부분적 업그레이드도 빠진다. 구체적 사례를 양국 협의로 정리해 보자.

그간 중국 국영기업을 향한 미국의 날 선 비판을 떠올리면 반도체지원법은 아이러니다. 국영기업에 맞서고자 또 다른 국영기업을 만드는 작업이다. 혁신과 경쟁을 가로막는 관치 반도체 산업으론 미국이 구상하는 반도체 부흥을 이루기 힘들다.

지난해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양국은 이미 큰 비용을 치렀다. 연이어 등장한 반도체지원법이 비슷한 길을 간다면 양국 관계에 큰 부담이 될 것이다. 현명한 타협점을 찾아 한미 동맹 70주년의 의미를 살리자.

이재민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