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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한·일 관계 개선은 양국 모두의 시대적 사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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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명예이사장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명예이사장

나날이 가속하는 미·중 패권 경쟁으로 기존 세계 안보·경제 질서가 빠른 속도로 와해·재편되고 있다. 특히 인도·태평양 지역에서는 이미 14개국이 참여하는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미국·일본·인도·호주의 4개국 안보 다이얼로그인 쿼드(Quad), 호주·영국·미국이 참여하는 오커스(AUKUS) 안보동맹이 출범했다.

그리고 동북아 지역에서는 반도체를 비롯한 최첨단 기술 제품공급망 재편이 빠르게 진행 중이다. 게다가 이 지역은 북한의 핵 공격 위협에 따른 심각한 안보위기를 맞아 기존의 한·미, 미·일, 그리고 한·미·일 안보협력 체제의 업그레이드가 불가피한 상황에 놓여 있다.

따라서 지금 한·미·일 협력 체제의 약한 고리가 되는 한·일 관계의 개선은 ‘선택 아닌 필수’로 부상해 있다. 이러한 각국의 정책과 시장 기능에 따라 진행되는 공급망과 경제 체제 재편도 기존의 포괄적 다자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특징이다.

세계 안보·경제 질서 급속 재편중
한·일 관계 개선은 선택 아닌 필수
기시다 총리의 ‘감동적 화답’ 기대

윤석열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캄보디아 프놈펜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손을 잡은 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캄보디아 프놈펜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손을 잡은 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대통령실]

그렇다면 이러한 세계사적 대변혁의 주요인인 미·중 패권 경쟁은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공산당이 세운 신중국이 1949년 출범한 이후 100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 국제사회에서 영향력, 특히 군사력 면에서 세계 최강국이 되겠다는 중국몽(中國夢)을 2012년 제시했다. 이후 중국식 대장정이 이어지고 있다.

당초 중국몽의 목표는 전혀 달성 불가능한 것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 미·중 패권 경쟁이 본격 전개되면서 미국과 서방국가의 군사력 증강에 핵심이 되는 최첨단 기술 패권주의가 강화됐다. 이에 따라 이들 제품의 공급망이 중국에 불리하게 재편되고 있다.

이러한 대외경제와 안보 여건의 변화와 함께 중국식 국가 자본주의(State Capitalism)가 시장과 효용성을 중시하기보다는 시진핑 일인 체제의 공산당 이념과 국가주의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그 대장정 기간이 훨씬 연장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설령 중국몽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더욱 팽팽한 패권경쟁은 이어지고, 그 결과 세계 경제·무역·안보 체제는 더욱 불안정해질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와 지역에서 벌어지는 경제·안보의 여건 변화를 고려할 때 한·일 관계 개선은 한·일 양국과 한·미·일 3국의 경제·안보 협력 강화를 위한 ‘선택 아닌 필수’다. 한·일 양국 정부 모두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본다.

이러한 배경에서 일본을 한국의 경제·안보 및 글로벌 리더십 파트너로 바라보는 기본자세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한·일 관계 정상화에 걸림돌이 되는 강제징용 피해 보상해법을 포함한 윤석열 정부의 ‘한·일 관계 개선 이니셔티브’가 나온 것은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정부의 국민 설득이다. 일부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 10명 중 7명이 한·일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인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이번에 정부가 제시한 징용 피해 보상방안에 대해서는 국민 다수가 부정적 의견을 가진 것으로 여러 여론조사에서 나타났다. 일본은 과거 수차례에 걸쳐 정제되고 절제된 수사(Rhetoric) 차원의 사죄를 했다. 그러나 1970년 12월 7일 당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해 ‘게토 봉기 영웅 기념물’ 앞에서 헌화하다 갑자기 무릎을 꿇었던 장면에 버금가는 진정성 있는 반성과 사죄로 한국과 세계의 감동을 주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일본 내에는 한·일 양국 간의 협약을 정부가 바뀔 때마다 뒤집는 한국에 더 이상의 양보는 허용할 수 없다는 상당한 여론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미국을 위시한 세계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곧 열릴 예정인 한·일 정상회담에서 진정성이 배어있는 윤석열 이니셔티브에 대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감동 있는 화답’을 기대한다. ‘보통국가’로서 국력에 걸맞은 영향력과 리더십을 국제사회에서 발휘할 수 있게 국격을 향상할 절호의 기회로 활용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용단을 기대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970년 이후의 독일처럼 말이다.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명예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