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붉은 동백꽃이 봄 숲길에 송이째 툭툭 떨어졌다. 제주의 머체왓 숲길이다. 머체왓은 돌밭이라는 제주도의 방언이다. 화산이 늦게까지 폭발하여 만들어진 곳이다. 긴 세월이 흘러 돌밭에 흙이 쌓이고 나무들이 자랐다. 나무의 뿌리들은 땅속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길 표면에 핏줄처럼 드러나 있다. 이 길을 20여 명의 수행자와 함께 말없이 느리게 걸었다. 한 발 한 발 발바닥의 느낌에 집중하며 걷는 나를 온전히 바라보았다.
일주일이 훌쩍 지나 마애삼존불이 있는 서산의 가야산 옛 절터 이야기 길을 걷는다. 생강나무 꽃은 노랗게 피었고, 진달래는 곧 터질 듯 봉우리들 속에 한두 송이 분홍빛으로 피었다. 높다란 산등성이 길은 두 사람이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며 걸을 수 있게 잘 다듬어져 있다.
또 다른 수행자들과 마음을 챙기며 걷는다. 탁한 기운들은 밖으로 내보내고 신선한 봄기운이 가득 담긴 공기를 몸속 깊숙이 받아들인다. 마음을 다해서 숨 쉬고, 마음을 다해서 걷는다. 봄 숲을 온전하게 느끼며 걷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이다.
제주 돌밭, 서산 옛길 따라 걷기
잡다한 생각 한순간에 사라져
마음공부 하면서 걷는 게 최고
지금쯤이면 동백꽃이 나무와 땅에 지천으로 피고 지고, 진달래꽃이 바위 틈새마다 분홍빛으로 피어 바다를 향해 뽐내고 있을 해남의 달마고도가 생각난다. 숲길을 만들 때 중장비 없이 사람의 손으로만 만들어야 한다고 고집했었다. 나무도 바위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손길을 최소화하는 것이 사람의 욕심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한 가지 남는 아쉬움은 걷는 사람들에게 마음수행법을 전하지 못한 것이다.
어느 날 중국 회양 선사가 스승 혜능 선사를 찾아와 인사를 드렸다. “어디에서 왔는가?” “숭산에서 왔습니다.”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때 회양은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다가 8년 만에 깨달음을 얻고 다시 찾아가 “가령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서산 대사가 쓴 『선가귀감』이라는 책의 첫 머리에 나온 이야기이다. 이 책에는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의 거울과 같은 책’이라며, 생애 동안 한글로 네 번이나 번역한 법정 스님의 마음도 담겨 있다.
눈으로 제 눈을 볼 수는 없다. 눈의 존재를 확인하려면 눈을 크게 뜨고 휘둘러보면 된다. 마음공부를 하는 이들은 마음을 보려고 애쓴다. 그러나 마음이 마음을 볼 수는 없다. 마음을 확인하려면 손가락을 들고 튕겨보면 된다. 보는 것, 듣는 것, 튕기는 것, 생각하는 것이 모두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은 챙겨야 한다. 마음 챙기는 방법으로는 지금 이 순간 마음 다해서 숨 쉬고, 마음 다해서 걷는 것이다. 번뇌가 들어올 틈이 없이 지속하는 것이 삼매이다. 제자 회양이 어쩔 줄 몰라 쩔쩔맨 속 의문과 8년 동안 지속한 수행이 마음공부 방법의 핵심이다.
사람의 능력은 대단하다. 뇌파 분석을 하는 과학자들은 일반적인 사람이 하루에 4만7000가지의 생각을 한다고 한다. 옛 어른들의 오만가지 생각을 한다는 말과 비슷하다. 한순간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생각과 감각기관과 나라는 생각이 상호 결합하여 다양한 번뇌와 감정이 교차한다. 한순간 수많은 생각을 일으키는 능력으로 보면 대단하지만 어지러이 일어나는 생각으로 순식간에 마음을 놓치고 만다. 마음을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챙기는 공부가 필요하다.
주로 앉아서 생활하고 움직임이 적은 현대인의 생활환경에 맞추어 국토 곳곳에 걷는 길이 만들어졌다. 하루 만보 걷기를 권장하는 갖가지 상품광고도 나와 있다. ‘나는 살아있기에 걷는다. 걸으며 사색한다. 걸으며 적립도 한다. 걷기 앱으로 체크를 한다’ ‘건강은 첫걸음부터, 꾸준히 걷는 것만으로도 건강한 다이어트에 도움 돼요! 만보기 기능으로 걷기만 해도 드리는 보상캐시와 함께 성취감을 느껴보세요!’ 등등. 만보 걷기로 하루 100원씩 받는 앱도 있고, 적금하고 하루 만보씩 걸으면 이자가 올라가는 앱도 있다. 건강을 위해 걷는 것만으로 부족해 갖가지 유혹을 미끼로 붙인 것이다. 그러나 귀중한 발걸음을 더 값있게 만들려면 마음공부를 하면서 걷는 방법으로 향상하는 것이 최선이다.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은 아무도 먼저 가지 않은 길/ 지금 당신이 걷는 그 길은 아무도 먼저 걷지 않은 길/ 저마다 길이 없는 곳에 태어나/ 동천 햇살 따라 서천 노을 따라/ 길 하나 만들고 돌아간다.’
고규태 시인이 쓰고, 범능 스님이 작곡한 ‘길’이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는 또 하나의 길을 안성 비봉산 자락에 상좌 도원과 만드는 중이다. 낮은 산등성이 옛사람들의 길을 찾아 두껍게 쌓인 낙엽을 걷어내니 맨흙이 드러났다. 겨우내 얼어있던 땅이 녹으면서 흙이 부풀려져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맨발로 걸어도 좋겠다. 스스로 숨 쉬고, 스스로 걷고, 진실하게 살 일이다.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