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검정 고무신 100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이경희 기자 중앙일보 P디렉터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식민지 시기 고무신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양 신문물의 상징이었다. 조선 사람들이 신던 갖신이나 짚신보다 방수가 잘 되고 질겨서 실용적이었다. 구한말에 외부대신을 지낸 친일파 이하영은 사업 수완이 뛰어났다. 1919년 우리나라 최초의 고무신 회사인 대륙고무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고무신은 ‘호모화(護謨靴)’라고도 불렸다. ‘호모’는 ‘고무’의 일본어식 음차(音借) 표기다. 검정 고무신 초창기엔 고무신을 신으면 발이 썩거나 중독이 심해 병원에서 수술을 받기도 한다는 ‘호모화 중독설’이 돌았다. 그러나 대륙고무의 적극적인 반론, 조선왕실에서도 신는다는 마케팅 등에 힘입어 순식간에 조선인의 생필품이 됐다.

1921년부터 1년여간 경성(서울)에서만 고무신 88만 켤레가 팔렸는데 일본 수입품이 70만 켤레, 나머지는 조선 제조품이었다(동아일보 1922년 8월 21일자). 조선에서 고무신이 인기를 끌자 일본은 고무신 수출에 혈안이 됐고, 조선에서도 공장 수십 개가 난립하며 경쟁이 붙었다. 분쟁도 일어났다. 대륙고무가 자신의 것과 유사한 상표를 고무신에 붙여 판 평양서선고무공장을 1925년 상표법 위반으로 고소한 것이다. 결국 서선고무공장은 1927년 고무신 2000켤레와 소송비용을 부담하고 여러 신문에 사죄광고까지 냈다.

그러나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원료 기근과 일제의 배급통제 때문에 고무공장이 대부분 문을 닫았다. 해방 이후 고무 원료 공급이 재개돼 고무신은 다시금 전성기를 맞는다. 1992~2006년 14년간 ‘소년챔프’에 연재된 최장수 만화 ‘검정 고무신’은 그 시절의 이야기다. 검정 고무신을 엄마 몰래 엿 바꿔먹던 부모 세대의 어린 시절을 꾸밈없이 그려 사랑을 받았다.

‘검정 고무신’ 만화 원작자 이우영 작가가 최근 세상을 등졌다. 애니메이션 저작권을 둘러싸고 제작업체 측과 오랜 법적 분쟁을 겪었다고 한다. 그는 원작자임에도 ‘검정 고무신’ 캐릭터를 등장시킨 만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피소됐다. 애니메이션 등 부가사업으로 인한 수익 배분도 미미했다고 한다. 사업추진 편의 명목으로 저작권을 포괄적·배타적으로 업체에 양도하는 불공정 계약을 맺은 게 화근이었다. 고무신의 시대는 끝났다. 원작자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불공정 계약도 사라질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