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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태환의 의학오디세이

플라세보 정치, 노세보 정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

선거철도 아닌데 거리를 가둔 메운 각 정당의 정치 현수막은 극단적이면서도 획일적이다. 서슬 퍼렇고 날 선 문구들은 상대에 대한 적대감으로 무장한 채 혼돈의 한국 정치 현주소를 보여준다. 물결처럼 펄럭이는 숱한 현수막의 앙칼진 단어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절로 어지럽다. 현재진행형 코로나에 끝 모르는 전쟁까지, 민생과 직결한 우리 경제는 경고등이 켜진 지 오래다. 치솟는 물가와 공공요금 인상으로 시민 모두가 먹고살기 힘든 시대를 힘겹게 건너가고 있지만, 정치는 여전히 민생에 유효하지 않으며 절망적이기조차 하다. 정치적 오해를 받기 싫어 짐짓 관심 없는 척하거나, 기계적 균형으로 애써 단어를 포장하고 싶지는 않다. 비틀거리는 서민경제는 여전히 진영 간 싸움에 포박당했으며, 그 책임은 명백하게 정치권에 있기 때문이다. 국민이 무슨 죄랴. 국민은 위로가 필요하다. ‘엄마 손은 약손’이라는 말처럼, 우리 정치가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건 언감생심인가.

마음 어지럽히는 정치 현수막
정치의 노세보 효과는 아닌지
민생위기 속 국민은 위로 필요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기쁨을 주다’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나온 ‘플라세보(placebo) 효과’는 가짜 약 혹은 꾸며낸 치료법을 환자에게 제안했는데 병세가 호전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심리적 요인에 의한 현상으로 ‘위약 효과’라고도 한다. 환자가 자신의 병세가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질병 치료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와 달리 ‘노세보 효과(Nocebo effect)’는 부정적 감정으로 인해 병세가 악화할 수 있다는 반대 개념이다. 진짜 약을 처방해도 그 약이 해롭다고 믿거나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함으로써 약효가 떨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독하게 말하자면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도 그러하다. 두 개념 모두 신뢰와 관련된 대중의 사회 심리적 반응이다.

플라세보 효과는 현재 상황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만으로 환자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환자에게 처방한 약이 어떤 연유로 작동할지, 그 시기는 언제부터인지 등 증상에 긍정적 변화를 줄 것이라는 의사 설명을 환자가 듣는 자체로 효용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환자가 의사의 처방약에 대한 맥락을 이해하면 효과는 더 커진다. 나아가 환자가 세심한 보살핌의 대상이 된다는 느낌과 주변으로부터 진정 어린 도움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진다면 플라세보 효과는 배가될 수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우리 정치의 대국민 설명은 늘 맥락이 없고, 설득력이 없으며, 대중 추수주의에 기반을 뒀다. 돌이켜보면 민생은 나아지고 모두가 행복해질 거라는 선거철의 선언과 구호는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정부 정책을 비웃듯 폭등한 부동산 가격이 그랬고, 정치권이 눈감아왔던 일부 귀족 노조의 고용 세습에 침탈당한 청년들의 일자리가 그랬으며, 날로 심화하는 사회 양극화가 그랬다. 우리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그래서 이유가 분명하다. 신뢰를 잃어버려 희망을 찾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환자가 부정적이고 나쁜 결과가 예상된다는 의사의 설명을 듣는 경우에는 실제로 통증이 심해지거나 병세가 악화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노세보(nocebo) 효과다. 이는 꼭 통증이나 심리적 불편만의 문제가 아니다. 집단 히스테리와도 연결된다. 정치적 선동으로 판정된 광우병 사태가 그랬고, 코로나 초기의 사회적 불안감이 그랬다. 일방의 주장에 의한 근거 없는 소문이 돌 때, 대중은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회적 불안과 통증을 호소한다. 사회적 노세보 효과인 셈이다. 그러나 입증되지 않은 주장에 따른 혼란을 책임진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우리 정치가 경제 발전과 불균형을 이루며 후진성을 못 벗어나는 이유다.

인간에게는 모름지기 자연 치유 능력이 있다. 심리적 안정 상태에서 발현되는 뇌와 정신의 자연적 자가 치유 능력이다. 이런 능력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이 치료가 효과 있을 것이다’는 기대와 함께 치료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상대에 대한 칭찬과 협력보다 비관과 삿대질로 점철된 진영논리의 결집은 사회적 노세보 효과를 부른다. 국민의 신뢰 기반을 허문다. 거짓된 선동은 유효기간이 짧다. 결속력은 강건하지 않고 느슨하다.

플라세보 효과는 인디언 기우제 같은 주술적 개념이 아니다. 의료계에서 여전히 신약 임상시험의 과정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인간 뇌 속에서 실현되는 정신작용의 일부로 평가받고 있다. 현존하는 고통을 인정하고 치료에 대한 적절한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런 기대야말로 의사와 환자 사이의 꼭 필요한 신뢰 틀이라는 사실은 현대 의학의 결정적 발견이다. 한국 정치는 국민에게 플라세보 효과인가, 노세보 효과인가. 현재로선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이를 입증하듯 오늘도 거리에는 비판과 선동이 가득한 정치 현수막이 즐비하다. 어김없이 봄은 왔는데 국민의 마음은 여전히 혹한이다.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