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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저녁 있는 삶, 저녁밥 없는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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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최현주 기자 중앙일보 기자
최현주 증권부 기자

최현주 증권부 기자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근로시간이 길기로 유명하다. 1996년 OECD 가입 후 선두권을 놓치지 않았다. 지난해 연간 1915시간, 5위였는데 여전히 OECD 평균보다 199시간 오래 일한다. 이 때문에 ‘노동 지옥’이라는 오명을 입었지만, 사실 한국은 일찌감치 근로 환경에 대한 법적 장치를 마련했다. 예로 1953년 최초의 근로기준법을 제정했다. 근로자에 연·월차는 물론 공휴일 휴무, 주휴일, 생리휴가까지 보장했고 모두 유급이었다. 현재 생리휴가는 무급이다. 이때부터 ‘주 단위’ 근로시간을 따졌다.

근로법이 확 달라진 건 1996년 ‘노동법 날치기’ 사태 이후다. 당시 여당이 야당에 알리지 않고 새벽에 몰래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전의 근로법을 무시하고 아예 새로 만들었는데 이때 도입된 탄력적 근로시간제는 ‘공짜 야근’의 빌미가 됐다. 근로시간과 관계없이 일정한 임금을 보장하는 제도다. 야근이 공식적으로 허용됐고 ‘근로시간=업무성과’라는 인식은 아직도 여기저기에 깔려있다.

윤석열 정부의 근로법 개정안이 논란이다. ‘주 단위’ 근로시간을 ‘월 단위’로 확대하고 야근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린다. 현재 주 최대 52시간(40시간+연장 12시간)에서 최대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다. 일주일에 6일을 하루 11시간씩 일할 수 있고 야근한 만큼 휴가를 갈 수 있어 주4일 근무가 가능하다.

근로자 간에도 찬반이 갈린다. 대개 업종·규모로 나뉜다. 반도체·기계·철강·게임 같이 납품 마감이 있는 업종 종사자는 찬성이다. 당장 마감이 코앞인데 주 52시간 지켜가며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다. 반면 중소기업 종사자는 대체 인력이 없어 휴가로 보상받지 못할 공짜 야근의 부활을 우려한다. 입장은 다르지만, 이들의 근본적인 바람은 하나다. 휴가든, 수당이든 야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다.

2018년 주 52시간제가 도입될 때도 제조업을 중심으로 줄어들 야근만큼 줄어들 수당에 대한 걱정이 컸다. ‘저녁 있는 삶’도 좋지만, ‘저녁밥 없는 삶’은 곤란해서다. 근로시간 규제가 획일적일 필요는 없다. 업종·규모별로 탄력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일해야 할 사람은 일할 수 있게 하고 쉴 사람은 쉬게 하자. 다만 야근에 대한 보상은 분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