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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주69시간과 0.78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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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여성국 기자 중앙일보 기자
여성국 IT산업부 기자

여성국 IT산업부 기자

“힘들지만 행복하게 일했어.” 자려고 침실 불을 껐는데 아내가 말했다.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아내는 최근 회사에 이직 의사를 밝혔고, 동료들과 함께 뽑은 후임자에게 한 달간 업무를 인계하고 있다. 임신·출산·육아를 준비하기 위해 근로시간은 줄이고 출산 후 고용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선택이었다. 아내는 구성원이 늘고 회사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대기업에선 느낄 수 없던 보람과 도전에 재미를 느꼈다고 했다. 이어 “그래도 우리 애 낳아야지”라고 말했다. 불 꺼진 천장을 보며 느낀 건 미안함일까 죄책감일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직을 하지 않는 한 출산 이후 육아 휴직을 쓰는 것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이날은 ‘세계 여성의 날’(8일)이었다.

6일 고용노동부는 주 최대 52시간인 연장근로시간 관리 단위를 확대해 유연화하는 근로시간 개편안을 발표했다. [뉴스1]

6일 고용노동부는 주 최대 52시간인 연장근로시간 관리 단위를 확대해 유연화하는 근로시간 개편안을 발표했다. [뉴스1]

아내는 바쁜 주는 52시간, 아니 60시간 넘게 일했다. 스타트업에서 이른바 ‘성장 마인드셋’을 가진 이들은 개인과 회사의 성장을 위해 대부분 그렇게 일하는 것 같았다. 남들과 똑같이 일하면 더 성장할 수 없고, 사업 초창기 등 특정 시기에는 몰입 노동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란다. 그건 기자나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휴가·휴식이 잘 보장되면 정부의 이번 근로시간 개편안처럼 주 69시간 일하는 주도 가끔은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직업인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출산을 고민하는 부부로 서 있는 자리를 바꿔보면 풍경은 달라진다. 아내에게 주 35시간 일하는 회사로부터 이직 제안이 왔을 때 우리는 솔깃했다. 출산과 육아를 생각하면 그랬다. 아내의 커리어에 도움되는 곳인지, 경력단절 가능성은 없는지 등을 저울질해봤다. 확실한 건 주 40시간 이하 근무는 엄청난 혜택이고 우리 부부에겐 출산율 0을 1로 만들 수 있는 유인 중 하나라는 것. 한편으론 주 52시간도 짧지 않고, 있는 휴가도 못 쓴다고 아우성인데, 주 69시간에 근로시간저축제를 시행한다는 정부안이 제대로 작동할까 싶었다. 출산율은 됐고, 외국인 노동자 문턱을 낮추고 근로시간을 길게 해 생산성을 끌어올리려는 건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워싱턴포스트는 11일 “긴 노동시간은 한국의 최저출산율(0.78명)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면서 세계보건기구를 인용해 “주 55시간 일하는 것은 건강에 심각한 위험을 준다”고 말했다. 정부 기대와 달리 MZ노조 협의체 ‘새로고침’도 “연장근로 관리단위 확대를 반대한다”면서 장시간 노동을 지적했다. 전경련에 따르면 여성의 경제활동 증가는 출산율 상승, 경제활동 인구 확대에 기여한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일하는 여성의 환경을 평가하는 ‘유리천장지수’에서 우리나라는 올해도 OECD 최하위를 기록했다. 아이를 갖고 싶은 당사자로서 임신과 출산을 진지하게 고민해보니 여성의 경력단절 가능성과 일·가정 양립을 위한 근로시간은 중요한 변수 같았다. 장시간 노동에 여성의 경력단절 우려가 계속되는 사회가 과연 합계출산율 0.78명을 벗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