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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동은이들 없게…‘더 글로리’가 보낸 위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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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학폭 피해자 문동은(송혜교)의 복수를 그린 ‘더 글로리’ 파트2가 10일 공개됐다. 지난해 말 전반부 공개후 두달만이다. [사진 넷플릭스]

학폭 피해자 문동은(송혜교)의 복수를 그린 ‘더 글로리’ 파트2가 10일 공개됐다. 지난해 말 전반부 공개후 두달만이다. [사진 넷플릭스]

한국사회의 민감한 ‘뇌관’인 학폭(학교폭력)을 정면으로 건드려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킨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가 지난 10일 마침내 베일을 모두 벗었다. 지난해 말 전체 16부작 가운데 전반부 8회만 공개한 지 두 달여 만에 나머지 절반을 공개하면서다.

‘더 글로리’ 파트2는 문동은(송혜교)이 온 생애를 걸어 준비한 복수가 깔끔하게 성공하는 서사를 선택했다. “그렇게 열여덟 번의 봄이 지났고 이제야 깨닫습니다. 저에게도 좋은 어른들이 있었다는 걸.” 이런 문동은의 대사처럼, 영혼까지 파괴된 학폭 피해자가 18년이라는 세월을 돌고 돌아 결국 드라마 제목처럼 ‘영광’을 되찾는 결말이다.

완결된 복수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뜨겁다. 공개 하루만인 11일 넷플릭스 시리즈물 글로벌 순위에서 3위(플릭스패트롤 집계)에 오르며 세계적 화제성을 입증했다. 절반만 보여준 다음 긴 공백기를 둬, 시청자들을 애태웠던 넷플릭스의 쪼개기 전략이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드라마가 화제가 되는 내내 ‘현실의 가해자’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난 1월 태국에서 학폭 폭로 릴레이가 벌어져 유명 연예인들이 줄줄이 사과한 데 이어 국내에서도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던 정순신 변호사가 아들의 학폭 문제로 하루 만에 사퇴하는 등 드라마가 현실에 미묘한 파장을 불렀다. 특히 파트2 공개와 동시에, 드라마를 만든 안길호 PD 자신에 대한 학폭 의혹이 제기돼 관심이 폭증했다. 이틀을 버티던 안 PD는 12일 변호사를 통해 “타인에게 지우지 못할 상처를 주었다”며 학폭 가해 사실을 인정했다. 피해자의 입장이든 가해자의 입장이든 학폭에서 자유로운 무풍지대는 없다는 우려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더 글로리’는 학폭이라는 너무나 익숙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복수의 과정을 치밀하게 세공하는 데 성공해 몰입감과 공감 모두를 잡았다는 평가다. 학교·부모는 물론 공권력에게까지 버림받은 사회적 약자 동은은 오랜 시간 가해자들의 약점을 캐내 증거를 모으고, 비슷한 처지의 폭력 피해자들과 손잡으며 복수의 판을 짜나갔다. 어느날 갑자기 부자로 변신, 일사천리로 반격하던 과거 드라마의 복수와는 기초 설계부터 달랐던 것이다.

박연진(임지연) 등 가해자들은 스스로 저지른 죄에 발목이 잡혀 불안에 떤다. [사진 넷플릭스]

박연진(임지연) 등 가해자들은 스스로 저지른 죄에 발목이 잡혀 불안에 떤다. [사진 넷플릭스]

동은이 자신의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가해자들의 공멸을 유도해 복수한다는 점도 기존 복수 서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대목이다. 가해자들 각각의 약점을 뒤흔든 결과 박연진(임지연), 전재준(박성훈) 등은 서로를 해치는 방식으로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는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지금까지 수많은 막장 복수극들은 사회 시스템의 문제로 벌어진 부조리를 피해자가 너무나 손쉽게 되갚아주는 데 성공해 허무감을 안겼다면, ‘더 글로리’는 가해자들이 저지른 죄 때문에 스스로 자멸하게 만들어 카타르시스와 위로를 줬다”고 평했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도 “문동은이 힘 있는 누군가를 고용한 게 아니라, 비슷한 피해자들과 연대를 통해 복수에 성공하는 점이 위로를 주는 부분”이라고 짚었다.

통상 넷플릭스는 시리즈의 전체 분량을 한꺼번에 공개했다. ‘더 글로리’처럼 두 파트로 쪼개 2개월 간격을 두고 공개하는 ‘파트제’는 흔치 않은 방식이었다. “3월까지 기다리기 힘들다”는 시청자들 아우성이 빗발쳤지만, 결과적으로 화제성을 지속시키면서 강화하는 ‘신의 한 수’가 됐다는 평가다. ‘더 글로리’ 파트2는 공개를 앞두고 “정주행 하려고 반차 냈다”는 SNS 글이 쇄도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공개 정각인 10일 오후 5시에는 접속 폭주로 인해 일시적으로 오류가 발생하기도 했다.

학폭 드라마의 파장이 어디로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관심사다. 정순신 변호사의 국가수사본부장 낙마 이외에 야구선수 안우진, MBN ‘불타는 트롯맨’의 황영웅 등 유명인들의 학폭 이력이 잇따라 도마에 올랐다. 정 평론가는 “드라마가 몇 개월의 간격을 두고 나눠서 공개되면서 한번 관심이 집중됐다가 잊힐 수 있었던 학폭 관련 사안들까지 지속되는 효과가 발휘됐다고 본다”고 평했다.

김은숙 작가와 배우 송혜교의 변신 성공도 수확으로 꼽을 수 있다. “엄마는 내가 누군가를 죽도록 때리면 더 가슴 아플 것 같아, 누군가한테 죽도록 맞으면 더 가슴 아플 것 같아?”라는 딸의 질문에서 학폭 드라마 집필을 시작했다는 김은숙 작가는 특유의 말맛과 세밀한 심리 묘사를 내세워 복수극을 효과적으로 요리했다.

그동안 멜로에 특화됐던 송혜교 역시 첫 장르물 도전에서 복수만 바라보며 달려온 인물의 메마른 얼굴 위로 분노·광기 등 다양한 감정을 그려내며 극을 이끌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한국의 드라마 제작 현실에서 작가나 배우는 초반 흥행작의 후광을 벗어나지 못하고 비슷한 작품을 재생산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창작에 제한을 두지 않는 글로벌 OTT의 전략과 두 사람의 도전이 잘 맞아떨어졌다”고 말했다.

다만 문동은과 주여정(이도현)의 로맨스가 전체 극의 분위기와는 동떨어져 몰입을 깬다는 반응, 여성 신체의 적나라한 노출 등은 상업적인 목적의 불필요한 요소 아니냐는 시청자 비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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