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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트루먼 명패의 뒷면

중앙일보

입력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한·일 과거사 문제는 지뢰밭이다. 독도, 위안부, 강제징용 문제가 난마처럼 얽혀 있다. 함부로 들어갔다간 길을 잃는다. 박근혜 정부는 위안부 문제의 문을 열었다가 중상을 입었고, 문재인 정부는 슬며시 되돌아 나와 그 문을 닫고는 지지율 호재로 사용했다. 그 지뢰밭에 윤석열 대통령이 다시 들어갔다. 무사귀환할 수 있을까.

결단은 필요했다. 막혀버린 한·일 관계의 물줄기를 터야 했다. 지정학적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두 나라의 과거 문제에 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재를 위태롭게 하고 미래를 좁히는 일이다. 당장 미국이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very much support), 윤 대통령의 국빈 방미가 결정됐다. 한미동맹이 한 단계 더 진화할 것이라는 기대도 커졌다.

그러나 현재로선 ‘대승적 결단’의 결과를 예단하기 힘들다. 해외 여론은 우호적이지만, 국내 여론은 갈린다. ‘동냥은 필요 없다’는 피해자 당사자의 목소리도 카랑카랑하다. 문제는 일본이다. 박근혜 정부와 위안부 합의를 했던 아베는 합의문 외엔 한 톨의 성의도 보이지 않았다. 위안부 피해자에 사죄 편지를 보내는 방안이 거론되자 “털끝만큼도 생각 없다”고 차갑게 대꾸했다. 그 순간 합의문은 한국민의 마음속에서 지워져 버렸고, 박근혜 정부 입장이 난처해졌다. 일본의 4월 지방선거 과정에서 비슷한 망언이 돌출하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 절반을 채운 잔이 더 차기는커녕 깨져버릴지 모른다.

“책임은 내가 진다”는 명패 뒤쪽엔
“나는 미주리주 출신이다”는 문구
현실도 당위만큼 살피겠다 의지
과거사 해결, 당위·현실 함께 봐야

총론이 옳다고 해서 각론을 안 짚어볼 수는 없다. 우리 패를 성급하게 보여줘 일본에 주도권을 넘겨줬다는 지적은 새길 필요가 있다. 한·미·일 삼각 공조를 앞세운 미국의 채근에 마음이 급했겠지만, 쫓기기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포커판에서 실력과 운 외에 지는 이유는 두 가지다. 돈이 적거나 일찍 일어나야 하거나. 실무진이 ‘속도 조절론’을 주장했으나 윤 대통령은 “책임은 내가 진다”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윤석열식 리더십을 응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런 만큼 정치적 부담은 오롯이 대통령의 어깨에 얹힐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결단하면 떠오르는 것이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의 명패(정확하게는 좌우명패)다. 명패에 적힌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는 대통령의 자세를 언급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구다. 2차 대전 중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급서(急逝)로 부통령에서 얼떨결에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이 명패 뒤에서 여러 역사적 결정을 내렸다. 두 차례의 원폭 투하, 마셜 플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창설, 베를린 공수 작전, 한국전쟁 파병 등.

그러나 트루먼의 명패에는 책임을 강조한 멋진 문구만 있었던 건 아니다. 명패 뒷면에 “나는 미주리 출신이다(I’m from Missouri)”가 적혀 있었다는 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사실이다. 결단을 앞둔 트루먼은 왜 자신의 출신을 되새겼을까.

지금은 공화당세가 완연하지만, 20세기 미주리는 전형적인 ‘스윙 스테이트’(민주당과 공화당을 번갈아 지지하는 주)였다. 그만큼 현실주의 기질이 강한 지역이다. 주의 별명이 ‘쇼 미(Show Me) 스테이트’다. “거품 문 공허한 웅변은 나를 설득하지 못한다. 나에겐 보여줘야 한다. 나는 미주리 출신이다”는 이 곳 출신 연방 하원의원 윌러드 던컨 밴디버의 1899년 연설이다. 미주리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다. “나는 미주리 출신”이라는 숨은 좌우명은 “따져볼 건 따진다”는 현실 중시 다짐은 아니었을까. 주세(州勢)가 약한 중부 출신으로 트루먼이 중앙 정치 무대에서 성공한 것도 이런 현실주의 덕분이었는지 모른다. 명패의 앞면이 대통령의 ‘당위’였다면, 명패의 뒷면은 정치인의 ‘존재’였던 셈이다.

지도자의 결단은 고독하다. 그래서 비장미를 띤다. 그러나 ‘결단’과 ‘독단’ 사이의 경계선은 생각보다 흐릿하다. 대통령은 개인이지만, 대통령직은 제도다. 공화적 가치가 집약된 헌법 기구다. 최종적 의사 결정은 지도자의 몫이지만, 마지막까지 듣고 설득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결단이라는 이름으로 덮어 놓은 의사 결정 과정은 종종 “나에겐 보여줘야 한다”는 날 선 목소리와 맞닥뜨린다. 당장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그렇다. 5년 단임제의 숙명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강제징용 해법은 윤 대통령 취임 후 가장 큰 결단이다. 정권의 지지 여부를 떠나 이 결단이 실패하면 한국 외교는 갈 길을 잃는다. 이를 위해서라도 당위와 존재(현실)의 조화를 찾아야 한다.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 일을 결단만으로는 할 수가 없다.

윤 대통령의 용산 집무실 책상 위에는 트루먼의 명패를 본뜬 명패가 있다. 지난해 5월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선물한 것이다. 그 명패 뒷면에 어떤 문구가 있는지, 혹은 비어 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만일 비어 있다면 어떤 문구를 써넣을지 윤 대통령이 고민해봤으면 한다. 결단은 현실과 결합할 때 더욱 단단해지는 법이다.

글=이현상 논설실장  그림=김아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