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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빵' 투자에 200조 물렸다…"SVB 파산, 스타트업 절멸할 수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10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에 있는 실리콘밸리 은행(SVB) 본사에서 한 고객(왼쪽)이 SVB가 공지한 안내문을 읽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10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에 있는 실리콘밸리 은행(SVB) 본사에서 한 고객(왼쪽)이 SVB가 공지한 안내문을 읽고 있다. AFP=연합뉴스

총자산만 2090억 달러(약 277조 원)인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했다. 미국에서 문을 닫은 은행 중 규모가 역대 두 번째로 크다. SVB가 미국 스타트업 회사들의 ‘돈줄’이었던 만큼 고객 회사들의 줄도산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영국 등 SVB의 해외 지점에서 영업중단 사태가 발생하면서 파장이 전 세계 스타트업으로 확산할 조짐도 보인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과 블룸버그 통신 등에 따르면 지난 10일(현지시간) 미 캘리포니아주 금융보호혁신국은 불충분한 유동성과 지급불능을 이유로 SVB를 폐쇄했다. 이어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설립한 법인 ‘산타클라라 예금보험국립은행(DINB)’이 SVB의 기존 예금을 모두 이전받고 SVB가 보유한 자산 매각에 나선다고 밝혔다.

SVB의 파산은 미국 은행에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붕괴한 워싱턴뮤추얼은행(자산 3070억 달러) 이후 최대 규모다.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과 IT 기업을 주 고객으로 상대해 온 SVB의 지난해 말 총자산은 2090억 달러다. 2021년 말(1160억 달러)보다 930억 달러 늘었다. 1년 만에 자산이 두 배 가까이 증가하면서 미국에서 16번째로 큰 대출 기관이 됐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이어진 초저금리 기조와 정부 지원에 힘입어 호황인 IT 업계의 돈이 SVB에 쏟아진 덕이다. SVB에 따르면 미국 테크ㆍ헬스케어 벤처기업 가운데 44%가 SVB의 고객이다.

몰락의 원인으론 이른바 무리한 ‘몰빵’식 투자가 꼽힌다. SVB는 고객이 맡긴 예금을 자금이 필요한 다른 소비자에게 이자를 받고 빌려주는 대출보다 미국 국채와 주택저당증권 등 장기 자산을 사들이는 데 더 썼다. 2021년 SVB가 매입한 미 국채 등 증권의 잔액은 1280억 달러였다. 미국 모든 은행 중 자산 대비 증권 투자 비율(55%)이 가장 높았다. 같은 기간 대출 규모는 660억 달러에 그쳤다.

매입 채권 헐값에 팔아 인출 자금 마련  

하지만 지난해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공격적인 금리 인상에 나서면서 시장이 얼어붙었다. 이에 성장에 타격을 입은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과 IT 기업들이 SVB에 맡기는 돈의 규모가 크게 줄었다. 도리어 돈줄이 마른 기업들은 예금 인출에 나섰다. SVB의 예금 잔액은 2021년 말 1890억 달러에서 지난해 말 1730억 달러로 줄었다.

예금 기업에 맡긴 돈을 돌려주기 위해 SVB는 그동안 사둔 미 국채 등을 팔아 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문제는 금리와 반대로 움직이는 채권 가격이 Fed가 지난해 벌인 사상 초유의 4연속 자이언트 스텝(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으로 인해 폭락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예금을 돌려주지 않을 수 없는 SVB는 울며 겨자 먹기로 채권을 헐값에 팔며 큰 손해를 봤다.

SVB는 손해 규모를 지난 8일 공개했다. 고객들에게 예금을 지급하기 위해 미 국채로 구성된 매도가능증권(AFS·만기 전 매도 의도로 매수한 채권과 주식) 상당량을 매각, 지난해 18억 달러 규모의 손실을 봤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22억5000만 달러의 신주 발행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하지만 이 발표는 또다시 고객들의 불안을 자극했고, 결국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를 초래했다. 더구나 예금액 대부분이 FDIC가 보증하는 예금자 보호(은행이 파산해도 정부가 일정 금액을 소비자에게 돌려주는 제도) 대상이 아니란 점도 뱅크런을 가속화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해 기준 SVB의 예금 96%는 FDIC의 예금자 보호를 받지 못한다”며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비보호 예금 비율은 38%”라고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SVB는 지난해 말 FDIC의 예금자 보호를 받지 못하는 예금의 규모를 1515억 달러(200조4000억 원)로 추정한다”고 전했다.

최대 25만 달러(약 3억3000만 원)인 미국의 예금자 보호 보장도 받지 못하게 되자 급해진 예금 고객들은 지난 9일 하루에만 420억 달러(약 56조 원)를 SVB에서 인출했다. 결국 다급해진 미 금융당국은 SVB가 손실을 발표한 지 44시간 만에 파산 절차에 돌입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두려운 실리콘밸리 “13일의 월요일 온다”

실리콘밸리 은행(SVB)과 주가 그래프를 합성한 이미지. 로이터=연합뉴스

실리콘밸리 은행(SVB)과 주가 그래프를 합성한 이미지. 로이터=연합뉴스

이번 사태가 자금 상황이 좋지 않은 IT 기업들의 줄도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SVB와 거래했던 업체들은 은행 파산으로 수천 명의 정리해고가 발생하고 많은 근로자가 다음 급여를 받지 못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 전했다.

실리콘밸리 투자가들은 SVB를 다른 은행이 인수하도록 정부가 개입할 것을 요구하는 상황이다. 억만장자 투자자 빌 애크먼은 트위터를 통해 “JP모건이나 뱅크오브아메리카와 같은 대형 은행이 월요일(13일) 주식시장 개장 전 SVB를 인수하지 않거나 SVB 예금 전체를 정부가 보증하지 않으면, 모든 SVB의 예금이 인출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벤처 투자가 데이비드 삭스는 트위터에 “파월은 어디에 있나? 옐런은?”이라며 “지금 이 위기를 멈추고 모든 예금이 안전할 것이라고 발표하라”고 촉구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SVB 파산과 관련해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대책을 논의했다.

백악관은 성명에서 “대통령과 주지사가 SVB와 이 상황을 다루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논의했다”고 전했다.

“전 세계 IT 기업 절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파는 전 세계로 번지는 중이다. 각국 규제 당국은 사태를 주시하며 대응에 나섰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영국 SVB도 파산 절차를 밟을 예정으로 거래를 중단하고 신규 거래를 받지 않고 있다. 블룸버그는 “SVB는 캐나다, 중국, 덴마크, 독일, 인도, 이스라엘, 스웨덴에도 지점을 두고 있었다”며 “(벤처) 창업자들은 정부의 개입이 없다면 전 세계 스타트업이 절멸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대형은행을 비롯한 금융권 전반의 위기로 확산할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본다. SVB는 스타트업에 특화된 형태의 은행이어서 다른 금융 기관 구조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금리에 민감하게 돈을 움직이는 기관투자자 비중이 높은 SVB와 달리 대부분의 시중은행은 개인 소비자 비중이 높아 뱅크런에 휘말릴 확률이 낮다. 비베크 주네자 JP모건 애널리스트는 “대형 은행들은 훨씬 더 많은 유동성을 갖고 있고, 다양한 사업 모델로 다각화돼 있으며, 위기에 더 잘 대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Fed 금리인상에 제동 걸 수도”

다만 Fed의 향후 금리 인상 방침에 제동을 걸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SVB 파산 이후 미국 은행업계의 불안정성이 증폭될 경우 Fed의 통화정책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했다. 시장에선 지난달 베이비 스텝(0.25%포인트 금리 인상)을 밟았던 Fed가 이번 달 ‘빅스텝’(0.5%포인트 인상)을 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하지만 Fed의 금리 인상이 SVB의 부실을 초래했다는 비판이 커지면 Fed가 급격한 금리 인상을 선택하기 힘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런 가운데 SVB가 폐쇄 직전 직원들에게 상당한 액수의 보너스를 지급한 것으로 나타나 논란이 커지고 있다. SVB는 지난 10일 폐쇄 결정이 내려지기 불과 몇 시간 전 직원들에게 연간 보너스를 지급했다고 미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가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보너스는 지난 한 해 동안 이뤄진 업무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악시오스는 당초 보너스 지급 일정이 이날로 예정돼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파산관재인으로 지정된 날짜와 일치했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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