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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차 쓰고 싶으면 안마해봐"…'휴가갑질'에 떠는 직장인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직장인 A씨는 연차 사용 전날, 상사로부터 “내 기분에 따라 (연차 승인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재차 연차 승인을 요청하자 상사는 “안마를 해보라”고 지시했고, 요구를 따랐는데도 상사는 “제대로 하지 않는다”며 승인을 계속 미뤘다. 결국 A씨는 연차 사용을 포기했다.

연차휴가를 모두 소진한 직장인 B씨는 상사로부터 노골적인 비난을 받았다. 상사는 “연차를 다 써서 업무에 딜레이가 생긴다”, “다른 사람은 업무가 없어서 연차 사용을 안 하는 줄 아느냐”, “어느 직장에서 연차를 다 쓰느냐” 등의 발언을 이어가며 B씨를 지속해서 괴롭혔다.

정부가 근로시간제 개편을 통해 ‘일할 때 집중적으로 일하고, 쉴 때 길게 쉬는’ 문화를 유도하겠다고 밝혔지만, 일선 직장 현장에선 여전히 ‘휴가 갑질’이 성행하고 있다. 주52시간제를 도입한 지금도 원하는 대로 휴가를 나가기 쉽지 않은데, 장기 휴가가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12일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지난해 한 해 들어온 휴가 관련 제보는 229건이다. 이 가운데 연차휴가 제한이 96건(41.9%)으로 가장 많았다. 뒤이어 병가 제한(67건·29.3%), 연차휴가 위법 부여(43건·18.8%), 연차수당 미지급(30건·13.1%) 순이었다.

실제로 자유로운 연차 소진은 직장인들에게 ‘그림의 떡’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직장갑질119가 여론조사 업체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해 지난해 12월 7일부터 14일까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휴가 제도 사용에 대해 설문조사를 진행해보니 10명 중 3명꼴인 30.1%는 ‘법정 유급휴가’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특히 300인 이상 민간기업은 16.0%인데 반해 30인 이상 300인 미만 기업은 27.0%, 5인 이상~30인 미만 기업은 36.8%, 5인 미만 기업은 49.4%로 나타났다. 규모가 작을수록 연차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현실에서 정부의 근로시간제 개편 방안이 오히려 연차 사용을 더 어렵게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 개편안은 주 단위로 관리하던 52시간 근로시간제를 노사 협의를 거쳐 월·분기·반기·연 단위로 확대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여기에 초과 근로시간을 휴가로 적립하는 근로시간저축계좌제를 도입해 추후 한 달 장기 휴가도 떠날 수 있도록 설계했다. 하지만 직장갑질119 관계자는 “주 52시간 상한제마저 제대로 안 지켜지고, 법정 연차휴가조차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것이 한국 사회 현실”이라며 “한 달 장기 휴가를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고 꼬집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전문가들은 개편안이 목적에 맞게 정착되기 위해선 실제 근로시간부터 제대로 측정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박지순 고려대 노동대학원장은 “(장기 휴가가 가능한) 저축계좌제가 보장되기 위해선 근로자들의 근로시간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관리할 수 있는 체계가 구축돼야 한다”고 밝혔다. 대표적으로 독일은 기업이 근로자들의 초과 근로시간을 기록하고 최소 2년간 보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 이런 의무 규정은 없다. 정부는 조만간 근로시간 기록·관리 강화 방안을 발표할 계획이다.

노사가 대등한 관계에서 주요 사안을 협의할 수 있는 환경도 갖춰야 한다. 국내 노동조합 조직률이 2021년 기준 14.2%에 불과해 자칫 사업주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근로시간제가 바뀔 수 있는 상황이다. 이에 정부는 근로자대표제를 실효성 있게 정비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노동계는 근로자대표 선출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용자의 개입·방해 행위에 엄중한 처벌을 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고 보고 있다. 박 원장은 “민주적인 방법에 의해 근로자대표를 선출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추고, 노사 대화 교섭 구조도 새롭게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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