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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로 내리쳐라"…없애려는 자와 살리려는 자, 휴대전화 쟁탈전

중앙일보

입력

‘인테리어 업자 등으로 하여금 대장동 사건의 주요 증거인 피고인의 휴대전화를 망치로 수 회 내리치고 불태우도록 하고….’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개시될 무렵인 2021년 9월 자신의 휴대전화를 급히 없애려던 김만배 화천대유 대주주의 시도는 지난 8일 검찰의 공소장에 담긴 또 하나의 혐의(증거인멸 교사)가 됐다. 김씨의 시도는 2016년 국정농단 수사 당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자택에서 발견된 메모를 연상시켰다. ‘휴대전화를 전자레인지에 돌릴 것’, ‘휴대폰 액정의 특정 지점을 부술 것’

최근 대부분 경찰과 검찰 수사 초기엔 휴대전화를 찾으려는 수사관들과 휴대전화를 없애거나 훼손하려는 피의자들의 숨바꼭질이 격렬하게 벌어진다. 교수 출신의 청와대 수석과 언론인 출신의 사업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2021년 9월29일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이 검찰의 압수수색 당시 투척한 휴대전화를 한 남성이 가져가는 모습이 CCTV에 포착됐다. 중앙포토

2021년 9월29일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이 검찰의 압수수색 당시 투척한 휴대전화를 한 남성이 가져가는 모습이 CCTV에 포착됐다. 중앙포토

경찰청의 ‘디지털 증거분석 현황’ 자료에 따르면, 스마트폰 등이 활발히 보급되기 전인 2010년에는 연간 6247건의 포렌식 건수 가운데 모바일 기기는 1611건으로, 25% 가량에 불과했다. 당시엔 PC와 노트북이 주요 분석 대상(3862건)이었다. 그러나 2021년에는 스마트폰 등 모바일기기에 대한 포렌식이 5만8563건(PC와 노트북은 1만3311건)으로 디지털 증거수집의 최전선이 됐다.

PC에 버금가는 성능을 갖춘 휴대전화는 확실한 물증의 보고다. 국정농단 수사가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실 비서관의 휴대전화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녹음파일이 무더기로 발견되면서 급물살을 탄 건 유명한 일화다. 이 전화기는 안 전 수석의 수첩과 더불어 ‘사초(史草)’라고 불렸다.

휴대전화에 남아 있는 위치정보, SNS 캡처 파일 등 다양한 정보는 압수 즉시 기기의 주인을 압박하는 무기로 돌변한다. 한 경찰 수사관은 “조직폭력배의 협박 사건을 수사할 때 휴대전화 GPS로 피의자의 알리바이를 깬 적이 있다”며 “GPS 기록을 삭제해 증거를 지워도 오히려 그 삭제 부분과 시점이 집중 추궁의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완전 삭제는 불가능…“부숴라” 유행

2019년 3월 빅뱅 승리의 성접대 의혹과 가수 정준영의 성관계 동영상 불법 촬영·유포 혐의를 수사하는 경찰이 과거 정준영이 휴대전화 복구를 맡겼던 사설 포렌식 업체를 압수수색 했다. 연합뉴스

2019년 3월 빅뱅 승리의 성접대 의혹과 가수 정준영의 성관계 동영상 불법 촬영·유포 혐의를 수사하는 경찰이 과거 정준영이 휴대전화 복구를 맡겼던 사설 포렌식 업체를 압수수색 했다. 연합뉴스

 범죄자들 사이에 휴대전화를 물리적·화학적으로 훼손하는 노하우가 공유되는 건 포렌식 기술의 발달로 인해 ‘삭제’로는 수사의 맥을 끊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보안성이 높다는 텔레그램 등 메신저 대화도 상당 부분 복구가 가능하다. 한 법무법인 포렌식센터 관계자는 “지운 정보를 복원하는 게 포렌식의 핵심”이라며 “영구 삭제된 정보도 상당부분 복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법무법인의 한 변호사는 “어떤 의뢰인은 압수수색에 앞서 재빨리 SNS앱 자체를 지웠지만, SNS를 캡처한 사진이 잔뜩 남아 소용이 없었던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

비밀번호 등은 큰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사이버 수사 경험이 많은 한 경찰 관계자는 “국내에서 암호가 안 풀리면 해외 업체에 문의해 결과를 기다리기도 한다”면서 “휴대전화에 남은 정보 확보는 시간과 노력의 문제”라고 말했다. 까다로운 암호체계 해제를 위해 검찰은 이스라엘 보안 업체의 포렌식 장비를 쓰고 있고, 경찰 역시 비슷한 전문 장비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물리적 훼손에 성공한면 수사망을 벗어날 수 있을까. 한 경찰 수사파트의 관계자는 “휴대전화를 한강에 갖다 버리면 우리도 답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갑자기 전개되는 압수수색에 앞서 휴대전화를 찾을 수 없는 곳에 버리거나 완전히 손상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검찰 수사관은 “요즘엔 휴대전화나 칩의 내구성이 좋아져서 웬만한 충격이 가해져도 외관만 손상되는 경우가 많다”며 “충격이 가해진 저장 장치에서도 남은 정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수사관은 “피의자들이 급박한 상황에서 휴대전화를 부수다 보면 메모리칩이 없는 엉뚱한 부분을 파손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반면 안 전 수석의 방법에 대해선 “전문적인 코치를 받은 것”이라고 반응이 많다. 고열이 일정시간 지속되면 메모리칩에 화학적 변형이 발생해 정보 복구가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화제발생 위험이 크다. 휴대전화 자체가 훼손되도 운영체제를 연동해 사용하는 다른 전자기기를 확보해 휴대전화 속 정보를 역추적하는 기법도 있다. 한 검찰 수사관은 “구체적인 방법은 비밀이지만 이런 방법으로 부서진 휴대전화에서 무엇을 지웠는지도 알아낼 수 있다”고 귀띔했다.

강제로 잠금 해제 위법논란 지속

5~6년 전부터 지문인식은 휴대전화 보안체계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폰아레나]

5~6년 전부터 지문인식은 휴대전화 보안체계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폰아레나]

 증거로서 휴대전화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만큼 이를 빼앗는 절차를 둘러싼 분쟁도 늘고 있다. 피의자가 휴대전화 잠금 해제에 홍채나 지문인식 방법을 이용할 경우 피의자의 동의 없이 강제로 생체정보를 이용할 수 있는지를 두고 초기에 논란이 있었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는 쪽으로 정리되고 있다. 한 검찰 관계자는 “휴대전화를 확보한 이상 기술적 수단을 이용하든 피의자의 협조를 구하든 그 안을 들여다보는 건 수사기관의 몫”이라며 “피의자가 잠금해제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증거인멸이 되진 않는다”고 말했다. 김병찬 대륙아주 변호사 역시 “헌법에 보장된 진술거부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영장으로도 피의자에게 비밀번호를 제출하는 등 특정한 행위를 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클라우드 서버 이용자가 늘면서 휴대전화 압수수색의 범위가 논란이 되기도 한다. 압수수색 대상을 ‘휴대전화’라고 명시한 영장으로 휴대전화와 연동된 클라우드 서버 속 자료를 압수할 수 있느냐가 종종 쟁점이 된다. 대법원은 압수수색 영장에 별도로 ‘클라우드 서버’를 명시해야 압수수색할 수 있다는 판단을 분명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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