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오랜 라이벌이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중국 베이징을 무대로 국교 정상화에 합의한 것을 두고 미국 내에선 바이든 정부의 외교 실패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와 시아파 맹주인 이란은 지난 10일(현지시간) 베이징에서 나흘간의 협상을 마치고 양국의 외교관계를 복원한다고 밝혔다. 이튿날 공개한 사진에서 두 나라 협상 대표가 손을 마주 잡는 가운데에는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중앙외사공작위 판공실 주임이 자리했다.
발표 이후 백악관은 "긴장 완화를 위한 노력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내놨지만, 중국의 역할은 애써 평가절하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이번 합의를 두고 "중국에 관한 것이 아니다"라며 "이란을 사우디와의 협상 테이블로 부른 것은 대내외적인 압력 때문이지, 대화하고 협상하라는 중국의 초청 때문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미 워싱턴 싱크탱크와 언론은 중동의 전통적 질서 유지자들을 제치고, 중국이 새 외교 무대에서 존재감을 과시한 상징적 사건으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이란의 동맹국이던 러시아, 사우디의 우방인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중국이 기민하게 이 지역으로 비집고 들어왔다는 이야기다.
미 싱크탱크 아틀랜틱카운슬의 조너선 풀턴 박사는 AFP에 "중국의 외교적 승리"라며 "중국은 미국이 우위를 점하고 있던 중동에서 도전할 공간이 있다고 생각하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 비영리단체 '중동 민주주의 프로젝트'의 에이미 호손 부국장도 "(이번 합의는) 중국을 외교적으로 새로운 리그로 끌어올릴 것"이라며 "바이든 정부가 집권 후 이 지역에서 했던 모든 일을 넘어서는 성과"라고 분석했다.
바이든 대통령 입장에선 사우디로부터 잇따라 뒤통수를 맞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간 반체제 언론인 피살 사건의 책임을 물어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를 비난해 온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유가가 치솟자 자존심을 굽히고 지난 여름 사우디에서 그를 직접 만났다.
여기서 기름값 안정을 위한 생산 증대에 합의했지만, 오히려 사우디는 감산에 들어갔다. 이에 격분한 바이든 정부는 사우디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편을 들고 있다며 책임을 묻겠다고 했지만 별다른 조처는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사우디는 미국이 공들이고 있던 이스라엘과의 관계 개선 대신, 이란에 먼저 손을 내밀었고 그 배경으로 중국을 택했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수잔 말로니 외교정책담당 부국장은 "홍보 면에서 중국에 엄청난 승리를 안겨주기로 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라면서 "이는 사우디가 바이든 정부에 또 다른 뺨을 때린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