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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돔에서 지켜본 한국 야구, 변화가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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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도쿄돔에서 열린 일본전 이후 관중들에게 인사를 하고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한국 선수들. 뉴스1

10일 도쿄돔에서 열린 일본전 이후 관중들에게 인사를 하고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한국 선수들. 뉴스1

모두가 뛰어갈 때 한국 야구는 제자리걸음을 했다.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은 한국 야구의 현실을 확인한 대회였다.

한국 야구 대표팀은 10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WBC 1라운드 B조 2차전에서 일본에 4-13으로 졌다. 전날 호주전 7-8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일본에게도 큰 점수 차로 압도당했다.

아직 2라운드(8강) 진출 희망은 있다. 남은 체코전(12일)과 중국전(13일)을 이긴 뒤 다른 나라 경기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 체코가 호주를 이겨 호주·한국·체코 세 팀이 2승 2패 동률이 되면 최소 실점을 따진다. 하지만 가능성이 높지 않다. 8강 진출 여부와 관계 없이 한국 야구의 현주소가 드러났다.

WBC에 출전한 30인 로스터는 최선에 가까운 명단이었다. 수술 뒤 재활로 빠진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 구단 반대로 합류하지 못한 최지만(피츠버그 파이리츠), 학교 폭력 문제로 낙마한 안우진(키움 히어로즈)을 빼면 뽑아야 할 선수를 거의 다 선발했다. WBC에서만 쓸 수 있는 한국 국적 이외의 선수(토미 현수 에드먼)도 처음으로 뽑았다.

그러나 한 수 아래로 꼽혔던 호주에게 졌다. 일본전은 더 심각했다. 구리야마 히데키 일본 감독은 "점수 차가 벌어졌지만(승리가)어느 쪽으로 굴러가도 이상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힘의 차이가 느껴지는 경기였다. 2013 WBC와 2017 WBC는 규정 숙지나 선발 과정, 전력 분석 등의 문제가 있었지만 이번엔 그것도 아니었다.

한국 야구선수들의 기량은 분명히 발전했다. 2017 WBC 당시 대표팀에선 시속 150㎞ 이상 빠른 볼을 던지는 우완투수가 이대은 1명이었다. 이번 대회에선 이의리, 곽빈, 원태인, 김원중 등 상당수의 한국 투수가 150㎞ 이상을 찍었다. 타자들의 힘도 예전보다 좋아졌고, 타자 위치에 따른 시프트 수비, 첨단 장비를 활용한 기술 분석 등 선진 야구도 이미 도입됐다.

하지만 다른 나라가 더 많이 강해졌다. 호주는 현역 메이저리거가 한 명도 없었지만 장타를 펑펑 때려냈다. 구원투수들은 제구력이 떨어졌지만, 기습 번트를 대거나 작전을 과감하게 펼쳤다. 이번 대회 최약체로 꼽힌 체코도 마찬가지다. 돔구장이 낯선 체코 선수들은 경기 전 더그아웃에서 사진을 찍으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회계사, 소방관, 외판원 등 '투잡'을 뛰는 선수들까지 포함됐지만 공수주에서 짜임새 있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과 격차는 더 벌어졌다. 2015 프리미어12에선 투수 오타니에게 압도당하긴 했어도, 결승에서 역전승을 거두고 우승했다. 4년 뒤 2019년 같은 대회에선 예선과 결승 모두 졌다. 2020 도쿄올림픽에서는 중반까지 접전을 펼치다 패했다. 그러나 이번엔 콜드게임패 직전까지 몰렸다.

실력 외적인 요소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자국 리그를 금방 마친 호주 선수들의 몸 상태는 좋았다. 반면 한국 투수들은 겨우내 쉰 뒤 몸 상태를 끌어올리는 중이다. 일본전 선발 후보였던 구창모는 지난 시즌과 같은 몸 상태를 만들지 못했다.

대표팀은 미국 애리조나 투손에서 소집됐다. 대표팀 사령탑이 KT 위즈 감독인 이강철 감독이고, 상당수 구단이 미국에서 전지훈련을 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소집기간 애리조나의 날씨가 좋지 않았다. 한 달도 되지 않는 사이 미국-한국-일본을 오가느라 지쳐 더욱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매년 WBC는 이 시기에 열리고, 일본도 같은 조건이었다. 변명으로 내세우기엔 궁색하다.

두 경기에서 드러난 가장 아쉬운 대목은 '투수'였다. 국제대회는 투수가 중요하다. 2006·2009 WBC 멤버인 이진영 SSG 랜더스 코치는 "당시 좋은 성적을 낸 건 투수력과 수비력의 힘이 컸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이번엔 2경기 만에 21점을 줬다.

이강철 대표팀 감독은 호주전 선발투수 공표 시간 불과 몇 시간 전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선발이 고영표라는 걸 공개하지 않았다. 상대가 대비할 수 없도록 투수를 감추는 건 당연한 전략이다. 실제로 데이브 닐슨 호주 감독은 "고영표가 선발로 나올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자신있게 내세울 카드가 없다는 의미다. 한국과 달리 호주는 선발투수를 미리 공개했다. 일본은 9일 중국전 선발(오타니 쇼헤이)과 10일 한국전(다루빗슈 유), 11일 체코전(사사키 로키) 선발까지 일찌감치 낙점했다. 한국은 9일 중국전 도중에야 일본전 선발을 김광현으로 정했다.

특히 제구력 문제를 드러냈다. 한국 투수들은 초구 스트라이크를 좀처럼 던지지 못했다. 변화구로 유인하는 볼 배합 영향도 있겠지만, 완전히 벗어나는 공도 많았다. 현장에서 중계한 이대호 해설위원은 "스피드도 스피드지만, 투수는 제구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용택 해설위원은 아마추어 야구의 변화를 제안했다. '알루미늄 배트' 사용이다. 박 위원은 "미국이나 일본과 달리 한국은 고교생이 나무 방망이를 쓴다. 투수의 공이 빠르면, 제구가 잘 안 돼 스트라이크 존 안에만 던져 타자를 압도한다. 알루미늄 배트를 쓰면 투수가 제구력을 가다듬을 수 밖에 없다"고 짚었다.

한국 프로 야구는 2000년대 초반 병역 비리, 관중 감소로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2006 WBC(4강), 2008 베이징올림픽(금메달), 2009 WBC(준우승)의 선전으로 중흥기를 맞았다. 신생팀 2개가 생겨 10개 구단 시대가 열렸고, 선수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연이은 국제대회 부진이 한국야구의 위기를 부를 수도 있다는 뜻이다. 프로야구를 관장하는 한국야구위원회(KBO)와 아마 야구 주체인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KBSA)가 고민해야할 때다.

라이벌 일본을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 일본 선수들은 이번 대회 내내 뛰어난 조직력과 팀워크를 선보였다. 국가 대표팀에 대한 헌신이 밑바탕에 깔렸다. 37세 베테랑 다루빗슈 유는 구단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찍 대표팀에 합류했다. 이미 FA 계약을 맺긴 했지만, 그만큼 대표팀에 대한 애정이 컸다. 투수들에게 계속해서 조언을 하고, 팀을 하나로 모으려고 애썼다. 일본 선수들은 "다루빗슈를 이기게 만들자"며 뭉쳤다.

도쿄돔 광장에서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출전하는 오타니 등 대표 선수들의 상품을 구매하려고 줄을 선 일본인들의 모습. 뉴스1

도쿄돔 광장에서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출전하는 오타니 등 대표 선수들의 상품을 구매하려고 줄을 선 일본인들의 모습. 뉴스1

일본은 국가대표팀을 '사무라이 재팬'이란 이름으로 브랜딩한 뒤 경기력 향상에 온 힘을 기울였다. 2013 WBC에서 대회 3연패 도전에 실패한 뒤, 전임 감독제를 도입했다. A매치가 꾸준히 치러지는 축구와 달리 국제대회가 적다는 어려움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도 했다. '사무라이 재팬 시리즈'란 이름으로 다른 나라 대표팀들을 초청하는 대회를 꾸준히 열고, 사회인 팀과 강화경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선수들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새 얼굴도 찾을 수 있다.

수익구조도 생겼다. 일본 야구 대표팀의 애칭인 '사무라이 재팬'이란 이름으로 별도의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상품 판매, 홍보를 시행한다. 매년 수익을 올려 대표팀 운영에도 도움이 되고, 팬들의 열기도 이어간다. 이번 대회에서도 일본 대표팀의 상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오타니의 일본 대표팀 유니폼은 매장이 열린 지 50분만에 동났다.

한국은 WBC나 올림픽 같은 대회가 있을 때만 대표팀이 소집된다. 아시안게임은 논란이 일자 23세 이하 어린 선수 위주로 꾸리기로 했다. 이번 WBC에 나선 선수들도 몇몇 베테랑을 빼면 국제대회 경험이 턱없이 부족하다. 부족한 경험, 압박감 속에서 좋은 경기력이 나올 리 만무하다. 대표팀 운영비는 KBO의 지갑에서 나온다. 잠시 운용됐던 전임감독제가 사라진 이유 중 하나도 '가성비'가 떨어진다는 지적이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KBO리그 타이틀스폰서 또는 중계권 계약에 국제대회 유치 관련 조항을 넣으면 된다. 호주나 쿠바 같은 나라 대표팀을 초청하는 대회를 매년, 또는 2년마다 개최하는 건 어렵지 않다. 물론 대회 시기와 선수 차출 등과 관련된 구단들의 대승적인 협조가 필수다. 지난해 행정적인 문제로 무산된 한·미 올스타전과 같은 실수를 저질러서도 안 된다.

허구연 KBO 총재와 10개 구단 고위층은 이번 대회를 현장에서 지켜봤다. 패배는 선수단만의 책임이 아니다. 한국 야구계의 방향타를 쥔 이들의 각성과 변화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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