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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치고 잠적" 소문 진짜였다…수십억과 함께 사라진 '오피왕' [사건추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부산 빌라왕'으로 불리는 A씨 법인이 소유한 부산 동래구 온천동 오피스텔 건물. 외벽엔 '전세사기' 등을 주장하는 벽보가 나붙었다. 김민주 기자

'부산 빌라왕'으로 불리는 A씨 법인이 소유한 부산 동래구 온천동 오피스텔 건물. 외벽엔 '전세사기' 등을 주장하는 벽보가 나붙었다. 김민주 기자

지난 10일 부산 동래구 온천동 빌라촌. 대로변 옆 골목으로 들어서면 11층짜리 신축 오피스텔 건물 한 채가 들어서 있다. 지난해 4월 준공됐고 33세대 규모다. ‘부산 오피스텔왕’으로 불리는 A씨(30대)가 대표로 있는 법인소유다. 오피스텔 외벽엔 ‘부산판 빌라왕 전세 사기’ ‘사기꾼 빚 떠안은 청년들’ ‘부산시는 피해자 대책 방안 마련하라’ 등 문구가 적힌 벽보가 여러 장 나붙어 있다.

지난달 16일 경매 넘어간 오피스텔 

이곳에서 만난 전세세입자 B씨(20대)는 “건물 전체가 지난달 16일 경매에 넘어갔다”며 “낙찰되더라도 (여기 세입자들은) 채권 순위가 밀려 한 푼도 못 받고 쫓겨나야 할 판”이라고 한숨 지었다. 그는 지난해 9월 이 오피스텔에 입주했다. 계약 기간은 2년, 보증금은 1억원이다. 이 중 8000만원은 중소기업 청년 전세금 대출을 받았다.

B씨는 한 부동산 정보 사이트에서 이 오피스텔 물건을 봤다. 역세권 신축건물인데다 직장과도 가까워 눈에 확 들어왔다고 한다. 집을 계약할 땐 A씨 회사 직원이라는 2명이 나왔다. 자신들을 ‘계약 대리인’이라고 소개했다. B씨는 “등기부 등본에서 확인되는 은행 근저당 규모가 53억원에 달했었다”며 “하지만 ‘법인 소유 건물 치곤 일반적인 수준’이란 공인중개사의 설명만 믿고 계약을 진행했다”고 말했다.

과도한 근저당 액수에 해당 오피스텔 세입자들은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전세보증금반환보증’도 들지 못했다.

지난 10일 오전 부산 동래구 온천동 A씨 법인 소유 오피스텔 건물 벽면에 세입자들이 붙인 벽보가 붙어있다. 김민주 기자

지난 10일 오전 부산 동래구 온천동 A씨 법인 소유 오피스텔 건물 벽면에 세입자들이 붙인 벽보가 붙어있다. 김민주 기자

관리비 오르더니 오피왕 사라졌다
나머지 세입자들도 B씨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지난해 6~11월 사이 입주했다. 입주 초기엔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계약 대리인으로 나선 A씨 법인 직원들이 오피스텔 건물을 관리하며 입주자들과 연락도 주고받았다.

그런데 평소 5만원 수준이던 관리비가 지난달 8만원 넘게 나오면서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관리비 인상을 이상하게 여긴 B씨가 관리사무소로 전화를 걸었다가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관리사무소 측은 “A씨 측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그간 A씨 측에서 부담해주던 일부 비용이 들어오지 않아 관리비가 높아진 것”이라며 “근저당을 설정한 은행 측에서 건물을 경매에 내놓을 것이라는 연락도 왔다”고 답했다.

이후 B씨는 이웃들에게 ‘잠적’을 알렸다. 다들 A씨가 사라진 걸 몰랐다. 더욱이 아무도 실제 A씨와 만나 계약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계약 대리인이었던 직원들에게 연락하면 “대리만 했을 뿐 무슨 일인지 모른다” “이미 회사를 그만뒀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A씨 법인 소유 오피스텔 세입자인 B씨가 법인 직원들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 김민주 기자

A씨 법인 소유 오피스텔 세입자인 B씨가 법인 직원들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 김민주 기자

"큰 사기 치고 잠적" 소문...공인중개사도 연락두절
온천동 오피스텔 세입자들이 계약을 맡았던 부동산 중개업소에 따지자 공인중개사는 “A씨 쪽에서 은행 대출 이자를 안 낸 모양이다. ‘큰 사기를 치고 잠적했다’는 소문이 있다”고 말했다. 이후 해당 공인중개사 역시 연락이 끊겼다.

보증금 반환 의무를 진 A씨가 나타나지 않으면, B씨 등 세입자들이 돌려받지 못할 금액은 최대 18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세입자들은 대부분 2030대 사회 초년생이다. B씨는 “변호사 등에게 조언을 받아봤지만 돈을 돌려받기 어려울 거란 답을 들었다”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며 내년 결혼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모든 게 물거품이 될까 두렵다”고 말했다.

같은 수법 또 있다...피해 눈덩이

A씨는 법인을 통해 실질적으로 오피스텔 등 100여채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당 법인의 서면 오피스텔(63세대 규모)도 문제가 터졌다. 이 오피스텔 세입자들은 현재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곽경도 법무법인 상지 대표변호사는 “온천동 오피스텔과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입주가 이뤄졌다”며 “다만 A씨 회사 직원들이 ‘중개보조원’을 자처하며 공인중개사 없이 계약하는 방식을 적극 유도한 거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들 63세대 앞으로 설정된 은행 근저당권은 80억원이 넘는다. 곽 변호사는 “A씨 측에 내용증명을 보냈지만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왔다”며 “다음 달까지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세입자가 대부분이다. 피해 추정액이 60억원에 달한다”고 말했다.

 10일 오전 부산 동래구 온천동 A씨 법인 소유 오피스텔 건물 벽면에 세입자들이 붙인 벽보가 붙어있다. 김민주 기자

10일 오전 부산 동래구 온천동 A씨 법인 소유 오피스텔 건물 벽면에 세입자들이 붙인 벽보가 붙어있다. 김민주 기자

세입자들은 보증금 반환 청구 소송과 더불어 A씨를 사기죄로 고소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 곽 변호사는 “광안리에 있는 A씨 소유 오피스텔 7채에서도 비슷한 피해가 있는 걸로 안다”며 “빚 청산 때 근저당권 권리가 전ㆍ월세 보증금보다 앞선다. 이런 경우 가급적 전세 계약을 피하거나, 월세를 내더라도 보증금을 낮추는 편이 안전하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중개보조인이 수수료 감면 등을 내세워 공인중개사 없는 계약을 유도하면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A씨 뒤를 쫓는 부산경찰청 관계자는 “피해자들이 제기하는 의혹 내용을 포함해 A씨 소유 주택이 더 있는지 확인하며 집중 수사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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