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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이겼으니 사죄·배상 필요없다"…한·중 다른 강제징용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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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NHAP PHOTO-2897〉 대법, 13년 만에 일본기업 강제징용 배상책임 확정   (서울=연합뉴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30일 2014년 사망한 여운택 씨 등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는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소송 제기 후 13년 8개월 만에 피해자들의 승소로 마무리됐다. 사진은 일본 공사현장에서 토목 노동을 하는 강제징용 조선인들. 2018.10.30 [해외교포문제연구소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photo@yna.co.kr/2018-10-30 14:51:22/ 〈저작권자 ⓒ 1980-201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YONHAP PHOTO-2897〉 대법, 13년 만에 일본기업 강제징용 배상책임 확정 (서울=연합뉴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30일 2014년 사망한 여운택 씨 등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는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소송 제기 후 13년 8개월 만에 피해자들의 승소로 마무리됐다. 사진은 일본 공사현장에서 토목 노동을 하는 강제징용 조선인들. 2018.10.30 [해외교포문제연구소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photo@yna.co.kr/2018-10-30 14:51:22/ 〈저작권자 ⓒ 1980-201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2016년 일본 기업 미쓰비시는 일제가 중국을 강점하던 동안 중국인에게 행한 강제노역에 대해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고 1인당 10만 위안(약 1900만원)을 지급한다고 발표했다. 중국인 피해 노동자들이 일본 법원에 제기한 소송 결과였다. 또 일본 외무성이 작성한 ‘중국인 노동자 사업장별 취로 조사 보고서’에 수록된 화해금 지급 대상 3765명을 모두 찾아 돈을 지급하기 위해 ‘역사인권평화기금’을 설치했다.

7년 전 있었던 이 일이 다시 떠올랐다. 2018년 한국 대법원은 미쓰비시 등 일본 기업들에 대해 조선인 노동자 강제징용 배상금 지급을 판결했다. 앞선 중국 사례와 비슷했지만 일본 정부와 해당 기업들은 완강히 반발했다. 이 문제는 일파만파로 불거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박근혜 행정부와의 재판거래 혐의로 사법 처리됐고,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무역규제를 조치하는 빌미가 됐다. 대한민국 사법부의 판결을 외국 기업에 강제할 수 없는 한국 정부는 제대로 된 해법을 내놓지 못하다가 이번에 윤석열 대통령이 결단을 내렸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 일본으로부터 받은 유무상 차관의 혜택을 입은 한국 기업들이 기금을 마련해 피해자들에게 보상하고 한일 경제단체 및 기업들이 양국 청년들을 위한 재단을 공동 설립하자는 내용이다.

야권과 친야 성향 단체들은 ‘매국’이란 표현까지 서슴지 않고 굴욕 협상이라며 반대했다. 반대 논리 중 하나가 중국 노동자에 대해 배상을 결정한 일본과 일본 기업들이 왜 한국에 대해선 다른 입장을 보이느냐였다. ‘일본이 중국에는 고개를 숙이고 한국은 호구 취급한다’는 선동이 들끓었다.

한국과 중국에 대한 일본의 입장 차이는 과거 제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 상대국과 어떤 보상 협정을 맺었는지를 봐야 이해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1965년 맺은 한일협정으로 국가와 민간에 대한 청구권 협정이 매듭지어졌다는 게 일본의 입장이다. 이 협정을 토대로 한국 정부는 1974년 약 92억원을 민간에 보상했다. 2005년 노무현 정부가 민간 청구권 문제를 다시 들여다봤지만 ‘강제징용 청구권은 최종적으로 완전히 해결됐다’고 결론 내리고 한국 정부 재원으로 7만8000명에게 약 6500억원을 지급했다.

중국과는 어땠나. 1952년 일본은 장제스(蔣介石)가 통치하는 대만 정부를 유일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화일(華日)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때 장제스는 일체의 청구권과 배상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원수를 은혜로 갚는다’는 명분이었다. 일본 유학파인 장제스는 일본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본토 중국과 대결해야 하는 입장에서 또 다른 이웃 대국인 일본과의 협력은 필수적이었다.

이후 1970년대 들어 과거 일본군으로 징병됐던 대만 출신 병사들에 대한 보상 요구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일본 내에서도 보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1987년 법률을 제정해 대만 출신 병사들과 유족들에 대해 1인당 200만 엔을 지급했다. 보상금이 아닌 위로금 명목이었다.

1971년과 72년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잇따라 중국을 방문하며 ‘죽의 장막’이 걷혔다. 일본에서도 공산당 정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72년 7월 총리가 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는 곧바로 ‘중국과 협상을 원한다’고 밝혔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도 “베이징 공항의 대문은 일본의 새 총리에게 열려 있으니 언제든 오라”고 화답했다. 다나카는 그해 9월 25일 베이징 땅을 밟았다.

영빈관인 댜오위타이(釣魚台)에서 저우언라이를 만난 다나카는 자신이 불과 ‘54세에 일본 총리가 됐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저우는 “다나카 선생, 나는 51세에 총리가 돼 23년째 총리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만찬에서 다나카는 “과거 일본이 중국에 골치 아픈 일을 했고, 이 점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저우는 통역에게 ‘골치 아픈 일’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고 대답을 듣곤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날 저우는 다나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다른 나라보다 오래, 심하게 우리를 괴롭혔고 인민에게 끼친 손해도 가장 컸습니다. 이에 대해 다나카 선생이 의견과 역사적 평가를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후 시펑페이(姬鵬飛) 중국 외교부장을 만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은 “중국이 표현해 달라는 대로 우리가 표현한다면 우리는 귀국하자마자 하야해야 한다”며 곤란해 했다. 시펑페이는 ‘적당한 표현을 찾아보자’고 답했다.

다음날 새벽 오히라는 ‘이것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이라며 시에게 메모를 건넸다. “일본국 정부는 과거 일본이 전쟁을 통하여 중국 인민에게 조성한 중대한 손해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심각하게 반성합니다”라고 돼 있었다. 결국 이 문구를 중국 측이 받아들였고 당일 오전 ‘중일공동성명’이 발표됐다.

과거사 사과 문제와 함께 가장 큰 관심사는 배상 문제였다. 공동성명 제5항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중일 양 국민의 우호를 위해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 청구를 포기할 것을 선언한다”고 돼 있다. 배상금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배상금에 대해 마오쩌둥(毛澤東)은 ‘우리가 전쟁에서 이겼으니 사죄와 배상 따윈 필요 없다’‘일본 인민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욱연 서강대 중국문화학과 교수는 “마오쩌둥은 국가와 민족보다는 계급을 앞세우는 공산주의자 특유의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미국이 공산국가에 대한 원조를 금지해, 일본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을지에 대해 중국 정부가 회의적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이때 중국이 일본과 배상협정을 맺지 않은 것이 2016년 미쓰비시로부터 배상을 받을 수 있었던 근거가 됐다. 그렇다고 한국이 한일협정을 잘못 맺었다고 볼 수는 없다. 박정희 정부가 협정 체결 때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 유상 2억 달러는 당시 일본 외환보유고의 절반에 달할 정도로 큰 액수였다. 여기엔 한-미-일 3각 동맹을 구축해 공산권과 맞서려는 미국의 압박도 상당히 작용했다. 중국이 배상금을 사양한 반대급부로 일본은 적극적으로 중국에 경제개발원조(ODA)를 베풀었고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힘을 받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차이나랩 이충형 특임기자(중국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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