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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법률가와 정치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30호 30면

김창우 사회·디지털 에디터

김창우 사회·디지털 에디터

임금이 유학파 신하 잡수(雜手)에게 획기적인 수마투포온(手馬投抱溫) 아이디어를 전한다. 어서 설계도를 만들라는 임금, 그러나 잡수는 오후 5시까지 초등학생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 대안은 ‘늘봄학교’. 오후 8시까지 학교에서 아이를 봐주는 제도를 홍보하는 정부 광고다. 영상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웃는 임금과 신하의 모습으로 마무리되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영 떨떠름하다. “왕이 일을 시키니 부모는 집에 못 가고, 아이를 봐줘야 하니 선생님도 집에 못 가고, 모두가 불행해졌답니다.” “부모가 아이를 돌볼 시간을 마련해주는 게 나라가 하는 일이 아니었던가. 이 계책이 진짜 최선인가요.”

주 69시간, 강제징용 해법 등
설득 생략한 정책이 반발 불러

물론 맞벌이 부모에게 늘봄교실은 나쁘지 않은 대안이다. 문제는 야근과 주말 근무를 당연시하는 직장 문화다. 아이와 함께 일찍 퇴근한 잡수가 다음날 출근해 설계도를 그리면 안 되는 걸까. 금요일 오후에 “월요일 아침 임원회의에서 검토할 내용”이라며 자료를 던져주는 갑(甲)들에 속으로 욕을 한 경험이 없는 을(乙)은 드물 것이다.

최근 정부에서 내놓은 근로시간 개편안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 최대 주 52시간인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월, 분기, 반기, 연 단위로 확대하는 것이 골자다. 월 단위로 관리해 69시간씩 3주를 일하고 일주일을 쉬거나, 연 단위로 관리하면서 6개월은 주 69시간, 두 달은 휴가, 넉 달은 주 40시간으로 운용해도 된다. 주 40시간을 초과한 근로시간에는 1.5배의 임금을 지급하니 같은 시간을 일해도 총임금은 늘어날 수 있다. 기업은 추가 고용 없이 바쁜 시기에 맞춰 인력을 운용할 수 있다.

이 제도에 대한 반응도 미지근하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임모(35)씨는 “지금도 오후 9시면 퇴근하라며 사무실 전등을 일괄 소등하지만 어젯밤에도 어둠 속에 희미한 노트북 불빛 대여섯 개가 있었다”고 말했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제대로 시행할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을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법을 만들어 엄정하게 시행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법률가의 자세다. 하지만 정치인이라면 불안해하는 시민을 설득하고 공감을 끌어내는 과정까지 필요하다. 아니 법률가라도 법정에 서면 판사나 배심원을 설득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쓰지 않나. 윤석열 정부는 시민을 판사나 배심원이 아닌 방청객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설득과 공감의 과정을 생략하니 ‘검사 공화국’이라는 비난을 받는 것이다.

강제징용 해법도 마찬가지다. 1965년 일본이 5억 달러를 제공하면서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고 협정에 명시했다. 그런데 대법원은 2012년 ‘개인은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국내 판결과 국제 협약이 상충하니 한국 정부의 입장이 곤란하다. 정부가 내놓은 ‘제3자 변제’는 포스코 등 청구권 자금으로 만든 기업이 수혜자니까 부담하라는 것이다. 감정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가장 무난한 대안이다.

하지만 이 또한 중간 과정을 빼먹었다. 강제징용 당시의 중노동과 인권 침해로 아직도 후유증에 시달리는 양금덕·김성주 할머니가 반대 집회에 참석해 “굶어 죽어도 그 돈을 안 받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만일 그 전에 대통령이 용산으로 모셔 “과거 정치인들이 제대로 매듭짓지 못해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렸어도 “윤석열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반발이 나왔을까. 외교부가 뒤늦게 피해자 측과 개별 소통에 나서겠다는데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다. 아프리카 속담이라고 한다. 서두르기만 해서는 멀리 가기 어렵다는 뜻일 게다. 때로는 좌우를 살피며 돌아가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더 빠를 수 있다. 시민들이 법률가 윤석열이 아닌 정치인 윤석열을 원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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