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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과 대화의 명수, ‘중용적 실천’의 달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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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0호 20면

이홍구 평전

이홍구 평전

이홍구 평전
김학준 지음
중앙북스

나라가 크게 혼란스럽다. 길은 보이지 않고 뜻은 모이지 않는다. 생각들은 너무 갈라져 있고 목소리들은 너무 크다. 지혜와 능력, 경청과 대화는 사라지고 일방적 내지름과 우격다짐만 난무한다. 그런 때에 시대와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 출간되었다.

대표적 정치학자인 김학준 교수가 쓴 『이홍구 평전: 효당 이홍구 전 국무총리의 정치철학과 현장실천』이다. 주지하듯 이홍구는 학문과 실천의 영역 모두에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책의 부제 ‘정치철학과 현장실천’은 이를 잘 보여준다. 객관적 사실과 기록을 중심으로 이홍구의 생애와 학문을 촘촘히 정리하고 종합한 본서는 그 자체로 한국 정치학의 큰 업적이라고 불러 손색이 없다.

청년 시절 수학 기간 동안 이홍구는 당대 최고의 정치학자들로부터 지도를 받는 과정을 거쳤다. 그가 받은 최고의 지적 훈련은 훗날의 깊은 학문과 넓은 실천의 자양분이 되었다. 나아가 그는 정치학의 세 중심 영역인 이론과 사상, 제도와 비교, 사례연구를 전부 섭렵함으로써, 훗날 그가 한국문제의 세 핵심 차원, 즉 국내정치·남북관계·국제관계를 모두 연구하고 실천하게 되는 토대가 되었다.

1989년 5월 이홍구 통일부 장관이 김영삼 민주당 총재의 소련 방문을 앞두고 사전 브리핑을 위해 만나 악수하는 모습. 왼쪽부터 김상현 민주당 부총재, 최호중 외무부 장관, 김 총재, 이 장관, 박인택 상공부 차관. 모두 그 당시의 직함이다. [중앙포토]

1989년 5월 이홍구 통일부 장관이 김영삼 민주당 총재의 소련 방문을 앞두고 사전 브리핑을 위해 만나 악수하는 모습. 왼쪽부터 김상현 민주당 부총재, 최호중 외무부 장관, 김 총재, 이 장관, 박인택 상공부 차관. 모두 그 당시의 직함이다. [중앙포토]

실제로 이홍구의 학문과 실천은 이 영역들 모두에 정통하였다. 그는 현대한국의 세 층위와 과제를 모두 연구하고 다뤄본 거의 유일한 학자-실천가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를 빌면 종합학으로서의 (한국)정치학에 최적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한국정치학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그린 학자라는 진술은 정확한 평가였다.

한국정치학의 역사에 비추어 유길준·이승만·안국선의 근대 정치학을 거쳐 이홍구는 현대 정치학을 정초한 일인이었다. 세계 이론 흐름의 적시 소개를 포함해 그는 한국정치학과 보편사유를 연결한 개척자였다. 그러나 그는 일방적 경도는 늘 지양하였다. 그는 주체성과 보편성, 즉 한국 문화와 역사 및 보편과 세계의 상향(相響, confluence)에 남다르게 주목하여 담론을 제시하였다. 그의 정치학이 주체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내장한 최고 경지에 도달한 연유였다.

이홍구는 학자이면서 실천가였다. 요컨대 학자-실행가였다. 정치철학이 말하는 국가운영 성공의 3대 요소, 즉 최고 지도자의 덕(德), 총리·수상의 지혜(賢), 그리고 공직자들의 능력(能), 이 셋 중 그는 지혜를 소유한 현자였으되 삶과 실천에서는 덕과 능력을 함께 보여주었다. 덕망·학식·능력이 각각 출중한 사람은 많으나 이를 두루 갖춘 사람은 정말 드물다. 그가 당대의 경세가가 된 연유였다. 따라서 민주화 대전환기에 그가 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세 정부 모두에서 중책을 맡을 수 있었던 점은 당연하였다. 공동체의 시대적 요청과 그의 개인 자질, 즉 인품·애국심·전문성이 결합된 산물이었다.

자유는 그의 학문과 실천이 추구한 궁극적 목표요 가치였다. 자유가 개인과 공동체의 최고 가치였다면 중용은 삶과 실천의 제일 지표였다. 그는 일체 치우침이 없었다. 그의 중용은 궁행하되 동요가 없는 거연(居然)으로까지 나아갔다. 복잡한 현실을 다루는 글들임에도 그의 글을 읽고 나면 겸손과 맑음과 청아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중용과 거연 때문이었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공식 통일방안은 그에게서 나온 것이다. 공동체의 핵심과제에 대해 근본틀을 제시한다는 점은 학인으로서 최대의 기여이자 행복이었다. 또한 그는 대권정치를 넘어 의회를 중심으로 대화와 타협에 기초한 연립구조에 의해 구축되는 계승의 정치를 강조한다. 승자독식과 진영대결에 매몰된 오늘의 한국정치가 명심해야 할 요체다. 나아가 그는 사회가 정치체제보다 기초적 존재라는 철학이 확고하다. 둘 사이의 괴리는 사회보존에 위험하다. 우리 사회의 다원성과 자율성이 양극적 정치와 권력과 국가에 의해 크게 제약되고 있는 현실에서 정녕 깊은 통찰이다.

이홍구는 어떤 이견도 끝까지 듣는 경청과 대화의 명수였다. 그가 크리스찬아카데미(현 대화문화아카데미)를 포함한 시민적 소통을 항상 게을리하지 않은 것도 중용적 실천을 견지할 수 있는 한 요체였다. 우리 시대의 현자 이홍구의 중용과 대화의 철학과 실천은 나라가 진영으로 두 쪽 난 지금 더욱 절실하다.

미학이 본시 아름다움(kallos) 자체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과 이해의 탐구라는 점에 비추어 그는 정치의 미학에 관한 당대 최고였다. 가장 훌륭한 나라를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로 부른 이유다. 즉 정치의 미학적 경지, 곧 이홍구는 권력투쟁 및 현실로서의 정치와, 이상과 목표로서의 정치를 결합한 ‘중용적 실천’의 달인이었다.

그 중용적 실천은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자기 내적으로 통합하고 외적으로 결합한 정치(미)학을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정치와 정치학의 대종(大宗)이요 본령이자 이홍구의 학문과 현장이었다. 그 점에서 그는 정치를 중용으로 이해하고 실천한 정도전과 매디슨에 가장 가까운 학자요 실천가였다. 혼돈의 시대에 이 책을 통해 이홍구의 지혜와 나라 사랑이 널리 공유되길 소망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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