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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린뱌오에 “평화는 회담 아닌 전장의 산물” 전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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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0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6〉 

장제스는 두위밍을 끔찍이 아꼈다. 국방부장을 대동하고 동북 주둔 중인 두위밍 군을 독전하는 장제스. [사진 김명호]

장제스는 두위밍을 끔찍이 아꼈다. 국방부장을 대동하고 동북 주둔 중인 두위밍 군을 독전하는 장제스. [사진 김명호]

1959년 10월 말, 신중국 성립 10주년 기념식을 마친 마오쩌둥이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에게 지시했다. “수감 중인 전범 일부를 석방하자.” 1차 특사 대상 명단 33명을 작성한 저우가 국방부장 린뱌오(林彪·임표)에게 의견을 구했다. 평소 서류보기 귀찮아하던 린도 이날은 달랐다. 명단을 살핀 후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귀에 익숙하고 눈에 아른거리던 이름을 대하니 반갑다. 33명 중 30명 대부분이 황푸군관학교 시절 총리의 학생이거나 내 선배들이다.” 13년 전 동북에서 자웅을 겨뤘던 두위밍(杜聿明·두율명)을 찍어서 거론했다. “이름이 너무 뒤에 있다. 두는 북벌과 항일 전쟁에 공이 컸다. ‘동북 해방전쟁(국·공전쟁)’의 첫 번째 승리도 두가 병원에 입원 중이라서 가능했다. 사면 대상자 중 가장 비중이 큰 인물이다. 맨 앞에 넣자.” 저우도 동의했다.

몽고메리 “그 많던 병력 어디로 갔나”

동북의 대·소 도시에서 벌어진 농민들의 토지요구 시위. [사진 김명호]

동북의 대·소 도시에서 벌어진 농민들의 토지요구 시위. [사진 김명호]

1949년 1월 천이(陳毅·진의)가 지휘하는 ‘중공4야전군’에게 포로가 됐던 전 ‘동북 보안사령관’ 두위밍은10년 만에 감옥 문을 나왔다. 출감한 전범 중 가장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미국에서 귀국한 부인과 베이징 중심가의 옛집에 살며 집필과 여행으로 소일했다. 출옥 이듬해 여름, 2차 세계대전 시절 아이젠하워, 맥아더와 이름을 나란히 했던 영국 육군 원수 몽고메리가 중국을 방문했다. 저우언라이와 외교부장 천이가 마련한 환영 만찬에 두위밍을 배석시켰다. 몽고메리의 회고록에 두의 이름이 자주 등장했기 때문이다.

두위밍을 만난 몽고메리는 사위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을 축하하며 질문을 던졌다. “장군은 백만 대군을 지휘했다. 그 많던 병력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다.” 두의 손길이 맞은편에 있는 천이를 향했다. “모두 저 사람에게 줬다.” 천이 깔깔대며 손사래를 쳤다. “나는 그런 선물을 받은 적 없다. 우리가 야금야금 삼켰을 뿐이다.” 두가 말을 받았다. “웃자고 한 소리다. 원수의 말에 반은 동의한다. 나머지 반은 국민당군 스스로 자초했다. 동북의 첫 번째 전투에서 국민당 기계화 부대의 전차들이 린뱌오 원수의 전략에 무너진 후부터 판세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지휘관이 누구냐에 따라 약자가 강자로 변하는 것이 강자가 약자로 바뀌는 것보다 수월하다.”

파괴된 철로를 복구하는 국민당 군. [사진 김명호]

파괴된 철로를 복구하는 국민당 군. [사진 김명호]

1945년 겨울 동북에 진입한 두위밍의 국민당 군은 보통 군대가 아니었다. 미국이 제공한 온갖 무기를 갖춘, 미군이나 다름없었다. 두가 병력을 분산시키자 린뱌오는 기회라고 판단했다. 1946년 1월 15일 오후 2시 중앙군사위원회에 전문을 보냈다. “각개격파로 두위밍 군 전부를 소멸시키겠다. 가부와 공격 시점을 신중히 고려해주기 바란다.” 개인 의견도 피력했다. “국민당이 동북문제 담판을 거절하기 전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다.” 중앙의 답전은 린을 실망시켰다. “두위밍 군을 선제공격하면 국내외 여론이 우리를 질책한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일으킨 내전 책임을 우리가 뒤집어쓴다. 두의 부대가 어디를 진격하건 잠시 내버려 두고 정세를 관망하자.”

린뱌오가 참모처장 리쭤펑(李作鵬·이작붕)에게 심정을 토로했다. “중앙의 생각이 나와 다르다. 장제스의 성격을 잘 안다. 우리를 완전히 소멸시키지 못하면 죽어서도 눈을 못 감을 사람이다. 장이 말하는 평화는 우리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이다. 작은 승리로 부대의 사기를 올리고, 적의 기염에 타격을 가할 생각이다.” 마오쩌둥의 짧은 전문이 린을 안심시켰다. “회담이나 담판을 통해 이룩되는 평화는 없다. 평화는 전장(戰場)의 산물이다.”

린뱌오, 물 싫어해 세수도 거의 안 해

포로가 된 국민당 군. [사진 김명호]

포로가 된 국민당 군. [사진 김명호]

1월 17일 새벽, 린뱌오의 운전병이 사고를 쳤다. 전쟁 임박을 감지하자 바람난 과부와 차를 몰고 도망갔다. 린은 담담했다. “나도 그 나이 때 그랬다”며 말 등에 올랐다. 파구(法庫)현의 슈수이허즈(秀水河子)일대 산책을 마친 후 리쭤펑에게 지시했다. “슈수이허즈에 새로운 전장환경을 창조해라. 토지개혁 요구하는 시위를 선동해라. 민간인이 사는 집 한쪽에 조촐한 전선사령부를 설치해라.”

500가구가 사는 한촌(寒村)의 작은 점포에 딸린 방 두 칸을 군인들에게 빌려준 주인집 부부는 린뱌오가 누군지 몰랐다. 집 사방과 방 앞에 초소가 들어서고, 린이 나가고 들어올 때 총을 든 사람들이 따라 다니자 높은 사람인 줄 알고 기겁했다. 세숫대야, 책상, 물통 등 생활용품을 그냥 쓰라고 빌려줬다. 린은 온종일 벽에 걸린 군사지도 앞을 떠나지 않았다. 한번 자리에 앉으면 응시하며 미동도 안 했다. 잠도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났다. 물을 싫어하다 보니 세수는 거의 안 했다. 무전병이 베이징 지하당원이 보낸 암호전문을 들고 왔다. “두위밍이 베이징 의원에 입원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확인에 시간이 필요했다. 부관을 불렀다. 전쟁을 앞두고 린뱌오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지시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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