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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은 피죽도 못 먹는데 동네에 떡 돌린 엄마의 선견지명[BOOK]

중앙일보

입력

반에 반

반에 반

반에 반의 반
천운영 지음
문학동네

서울 연남동에 스페인 식당을 차렸던 그녀가, 펭귄이 뛰노는 남극에 빠져 지낸다던 그녀가 다시 소설로 돌아왔다. 소설가 천운영이 10년 만에 펴낸 소설책이다. 단편소설 9편을 묶었다.

 '작가의 말'부터 읽어 보자. 새 소설집의 관심사가 강렬하게 요약돼 있다.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에서 출발했는데 도착해보니 늙은 여자의 젖퉁이다."

 누가 뭐래도 이런 문장은 천운영이니까 쓸 수 있는 문장 같다. '여자아이 성기'는 20여 년 전 등단 단편 '바늘'에 대한 언급. 이 작품에 남성 몸에 새겨진 바늘 문신을 여성 성기에 빗대는 대목이 나온다. '늙은 여자의 젖퉁이'는 당연히 이번 소설집에 대한 이야기. 그런데 수록 단편들에 그려진 여성들의 가슴은 작가의 말과는 딴판이다. 이 여성성은 나이 드는 법이 없다. 어머니라서 그런 것 같다. 신체의 다른 부위는 쪼그라들어도 이곳만큼은 여전히 건강하고, 팥 알갱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덜 여문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어머니 혹은 아내 앞에서 아들이나 아버지는 한껏 주눅 들거나 염치없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표제작 '반에 반의 반'이 주눅 든 아들의 이야기. 어머니는, 피죽도 먹기 어렵던 시절 자식들은 굶길지언정 한사코 떡을 만들어 동네 사람들에게 돌렸다. 떡이 아니라 인심을 돌린 것. 그렇게 쌓은 인덕으로 어머니는 결국 면서기였던 아버지를 살렸다. 죽창 들고 몰려온 동네 사람들 가운데 어머니 떡 얻어먹지 않은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어머니가 늘그막에 낯 뜨거운 장면을 연출한다.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채 계곡물에 뛰어들어 또래 남정네들과 놀아난 것. 아들은 옆에 있었지만 훗날 이 장면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보다 중요한 건 이런 것이다. 아들은, 자식들은 어머니를 반에 반의 반도 모른다는 점 말이다.

 아름다운 소설 '아버지가 되어주오'는 평생 아내를 부려 먹고도 그런 사실을 의식조차 못 하는 철딱서니 없는 남편의 이야기다. 천운영은 쓴다. 아버지 혹은 남편의 역사가 투쟁의 역사라면, 어머니나 아내의 역사는 사랑의 역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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