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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표 김기현 1등공신 장제원…"나는 빈 배" 손사래 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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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원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달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2월 임시회 개회식에서 의원들과 인사하고 있다. 뉴스1

장제원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달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2월 임시회 개회식에서 의원들과 인사하고 있다. 뉴스1

“세상의 강을 건너는 그대, 자신의 배를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대를 상처 입히려 하지 않을 것이다.”

장자 외편 산목(山木)에 실린 ‘빈 배’라는 글이다. 최근 장제원 국민의힘 의원은 주변에 자신을 ‘빈 배’로 비유하곤 한다. 3·8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자신이 적극 지지한 김기현 대표가 당선된 뒤에도 그는 당직을 맡을 거냐는 질문에 “빈 배처럼 지내겠다”며 손사래를 치고 있다고 한다.

국민의힘 장제원 의원과 김기현 의원이 지난해 12월 26일 오후 부산롯데호텔에서 열린 부산혁신포럼 2기 출범식에 참석해 환담을 나누고 있다. 송봉근 기자

국민의힘 장제원 의원과 김기현 의원이 지난해 12월 26일 오후 부산롯데호텔에서 열린 부산혁신포럼 2기 출범식에 참석해 환담을 나누고 있다. 송봉근 기자

지난 8일 결선 투표 없이 단번에 52.93% 득표율로 김 대표가 당선되기까지 윤석열 대통령 최측근인 장 의원의 역할이 컸다는 게 여권의 중론이다. 지난해 연말 ‘김장 연대’(김기현·장제원 연대)를 결성하자마자 3% 안팎에 그쳤던 김 대표의 지지율은 단숨에 15%대로 진입했다. 당내에선 “한 자릿수와 두 자릿수 지지율은 천지 차이”라며 “장제원 의원이 전폭적으로 밀어준 게 전당대회 초반 김기현 대표가 상승세를 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여론조사 선두를 달리던 나경원 전 의원이 당권 도전을 저울질할 때 불출마 선택을 하도록 견제하고, 안철수 의원이 ‘윤·안 연대’(윤석열·안철수 연대)를 내세우자 친윤계가 견제구를 날리는 과정에서도 장 의원은 물밑에서 역할을 했다.

당내에선 김 대표의 당선으로 장 의원의 정치력이 재확인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불과 반년 전인 지난해 8월 31일 자신이 추천했던 대통령실 인사들이 대거 경질되자 장 의원은 “윤석열 정부에서 임명직 공직을 맡지 않겠다”며 2선 후퇴를 전격 선언했다. 그 뒤 여권 핵심부에서 멀어지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당내에선 “윤심(尹心)이 장 의원에게서 떠난 게 아니냐”는 말마저 돌았다.

그런 그는 당권 경쟁에 불이 붙으려던 지난해 연말 전면에 재등장했다. 당시만 해도 또 다른 친윤계 핵심인 권성동 의원이 출마 채비를 할 때였고, 나경원 전 의원 또한 범친윤계로 인식되던 때였다. 이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대중적 인지도와 지지율이 낮은 김기현 대표를 ‘단일 친윤 후보’로 내세우는 정치적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당시 당내 일각에서도 “무리수가 아니냐”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지만 결과적으로 장 의원의 베팅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만약 김 대표가 1차에서 과반이 넘어 당선되지 않고 결선 투표를 갔더라면 윤 대통령이 난감해지는 건 물론 친윤계 조직력 자체가 상당히 의심받을 상황이었다”며 “수면 위에서, 또 아래에서 장 의원이 조직을 총결집시킨 게 이번 승리의 동력”이라고 평가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3월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에 마련된 당선인 집무실로 출근하며 장제원 비서실장과 악수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3월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에 마련된 당선인 집무실로 출근하며 장제원 비서실장과 악수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그러나 이번 전당대회에서 장 의원이 입은 상처도 적잖다. 특히 나 전 의원의 불출마를 압박하는 과정에서 당내에서 ‘반(反)윤핵관’ 정서가 빠르게 번졌다. 다소 공격적으로 경쟁자를 쳐내며 김 대표를 돕는 장 의원을 두고 여권에선 “차기 사무총장을 맡아 총선 공천을 주무르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 어린 눈초리도 상당했다. 그러자 장 의원은 지난달 2일 페이스북에 “차기 지도부에서 어떤 임명직·당직도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김·장 연대’를 통해 김 대표의 지지율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김 대표의 외연 확장을 위해 전면에 나서는 일을 자제했다. 이후 장 의원의 페이스북은 9일 현재까지도 비활성화 상태다.

김 대표를 당선시킨 1등 공신임에도 장 의원은 여전히 공개 행보를 자제하는 모습이다. 전당대회가 열린 일산 킨텍스 행사장에서도 장 의원은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았다. 장 의원은 김 대표 당선 직후 “그동안 당이 똘똘 뭉쳐서 윤석열 대통령을 모시지 못해 늘 죄송한 마음이었다”“이번에 좋은 결과로 당이 대통령을 뒷받침할 수 있게 돼 정말 잘 된 일”이라는 소회를 주변에 남겼을 뿐이다.

국민의힘 중진급 인사는 “장제원 의원이 본인을 향한 ‘반(反)윤핵관’ 정서를 잘 알고 있고, 곡해받는 것에 대해 심적으로 매우 힘들어하고 있다”며 “본인이 당직을 맡지 않겠다는 뜻이 분명한 거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장제원(왼쪽) 의원, 나경원 전 의원. 뉴스1

국민의힘 장제원(왼쪽) 의원, 나경원 전 의원. 뉴스1

친윤계 일각에선 “장 의원은 오히려 대통령실의 뜻을 훨씬 온건하게 전달하고 조율하는 메신저”라는 말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친윤 재선 의원은 “어쩌면 윤석열 대통령에게 돌아가야 했던 화살마저도 본인이 대신해 다 맞고 있다”며 “누군가는 해야 했을 궂은일을 장 의원이 한 것”이라고 말했다.

여권에선 공식 직함을 갖는 것과 무관하게 장 의원의 영향력이 당분간 클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당직을 맡지 않는다고 해서 정치적 역할마저 내려놓는다는 뜻은 아닐 것”이라며 “이번 전당대회를 계기로 장 의원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은 더욱 공고해지지 않았겠느냐”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차기 총선의 판을 짜는 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 본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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