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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진석 칼럼

이제는 크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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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새말새몸짓 이사장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새말새몸짓 이사장

자랭이가 크면 병어가 되고, 병어가 크면 덕자가 된다. 일정 정도로 크기가 달라지면 다른 것이 되기 때문에 다른 이름을 붙인다. 빅데이터로 세상을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세상이다. 같은 데이터라도 크기가 수십 테라바이트나 페타바이트 이상 규모로 커지면, 전혀 다른 데이터가 된다. 작은 데이터에서는 찾을 수 없는 ‘법칙’이나 ‘규칙’을 큰 데이터에서는 발견할 수 있다. 사람도 그렇다. 마음의 크기가 다르면, 종으로서는 같지만, 사실은 차원을 달리하는 다른 사람이다.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이기 때문이다.

장자는 제대로 살고 싶으면 큰 붕새(鵬)처럼 큰 사람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은 “해나 달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우주를 겨드랑이에 끼고” 살면서 기능적인 ‘귀천’이나 ‘이해(利害)’에 좌우되지 않는다. 큰 사람은 본질을 살피고, 작은 사람은 기능에 빠진다. 공자까지도 큰 사람인 군자(君子)는 자잘한 기능에 빠지지 않는다(君子不器)고 강조한다.

마음의 크기 커져야 창의성 발휘
작은 사람은 정해진 기능에 집착
‘작은 지도자’들이 국사 맡아서야

『장자』에 나오는 얘기다. 혜자가 박씨를 얻어와 뒤뜰에 심었는데, 5섬이나 들어갈 정도로 큰 박이 열렸다. 박으로는 보통 바가지를 만든다. 이 박은 너무 커서 바가지로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박을 부숴버렸다. 장자가 이 소리를 듣고 혜자는 자신의 예상을 넘어선 크기를 다룰 줄 모른다고 힐난하면서 박이 그 정도로 크면 바다에 띄워놓고 배로 쓰면 된다고 가르쳐준다. 혜자를 쑥대 대롱처럼 작은 마음을 가졌다고 비웃기까지 한다. 장자는 큰 마음을 가진 큰 사람이라 큰 것을 크게 쓰는 창의력을 발휘하여 배를 만들었고, 혜자는 작은 사람이라 작은 마음을 가져서 바가지라는 정해진 기능 이상을 생각할 수 없었다. 인간의 본질인 상상하는 능력을 발휘한 사람과 정해진 기능을 구사하는 데에 갇혀 있는 사람의 차이다. 창의적이냐 아니냐는 결국 본질에 가까운가 아니면 기능에 가까운가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이것은 또 큰 사람이냐 아니면 작은 사람이냐가 결정한다. 결국은 크기다.

문명은 창의의 산물이다. 창의적이어야 먼저 만들고, 먼저 만들어야 주도권을 갖는다. 주도권을 가져야 더 자유롭고, 더 주체적이며, 더 독립적으로 산다. 창의적이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종속적으로 산다. 영어에서도 창의(creativity)라는 말은 “커지다”나 “자란다”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크레세레(crescere)와 한 뿌리다. 창의성은 성장과 관련된다. 마음의 크기나 지식의 양이 커져야 창의적일 수 있다. 큰마음으로 상황을 자유롭게 지배해야 창의적일 수 있지, 쑥대 대롱같이 작은 마음으로야 정해진 낡은 것들을 지키는 데에도 급급하다. 창의성은 은유(metaphor)의 한 형태다. 은유는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하여 서로 연결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창의를 연결이라고 한다. 서로 다른 것을 연결해 놓으면, 인간이 누리는 영토의 크기가 커진다. 영토의 크기를 키우는 일은 큰 사람만 할 수 있다. 전략적이다. 작은 사람들은 큰 사람이 키워놓은 영토에서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전전긍긍하며 기능적으로 정해진 자잘한 것을 지키는 데에 바쁘다. 전술적이다. 문명의 주도권은 창의적인 자, 즉 크기가 큰 사람이 잡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다른 나라에서 일군 창의의 결과를 받아서 살았다. 이제는 스스로 창의를 해내는 단계로 도약해야 한다. 도약의 성공 여부가 우리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도약해내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쇠락한다. 도약은 창의의 일종이다. 당연히 크기가 큰 사람만 할 수 있다. 문제는 나라는 커졌는데, 나라의 운용을 맡은 사람들은 나라의 크기에 맞게 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장관과 부총리를 지내고 국회의장을 하고 있다면 제도적인 면에서 지도층 중에서도 지도층인데, 그는 첨단전략산업위원회에 국회 내의 유일한 반도체 전문가인 양향자 의원을 배제하고, 그 자리에 위장 탈당 인사를 넣었다. 본질을 택했는가, 기능을 택했는가. 작은 사람인가, 큰 사람인가. BTS가 세계 최고를 해도 나라를 운용하는 지도층의 크기는 고작 이 정도다. 우리나라의 인재 간 불균형을 잘 보여준다. 위장 탈당은 제도를 유지하는 본질인 신뢰를 포기하고 작은 기능을 선택한 전형적인 사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작 이 정도의 크기들이 국사를 맡고 있다. 유권자들은 어떠한가. 특정한 집단들에게는 내 편이면 무슨 짓을 해도 정의이고, 상대편이면 무슨 짓을 해도 불의이다. 왜 고염무가 나라의 흥망이 필부들에게 책임이 있다(天下興亡, 匹夫有責)고 했는지를 알겠다. ‘필부’들은 본질을 지키는 크기를 가졌는가, 기능만 지키는 크기로 쪼그라들었는가.

크기가 없는 사람에게는 정의나 선악이나 진위나 공정이나 모두 폭력이 되기 쉽다. 착하고 옳은 사람이 되기보다 큰 사람이 되려 하자. 선악과 진위의 관념으로는 크기를 만들지 못하지만, 크기로는 진위와 선악을 통제할 수 있다. 이제는 크기다. 잔챙이로 살다 가도 괜찮은지, 최소한 한 번은 물어야 한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새말새몸짓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