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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인구 3%의 소수 한족 ‘학까’, 장정 공산군의 7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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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현대 중국을 읽는 또 다른 키워드 ‘학까’

김기협 역사학자

김기협 역사학자

밖에서 보면 하나의 조그만 성곽이고, 안에 들어가 보면 큰 마당을 둘러싼 다세대주택이다. 진흙으로 쌓은 투러우(土樓)는 푸젠(福建)·광둥(廣東)·장시(江西), 3성이 만나는 영남(嶺南)지역에 지난 수백 년간 지어져 수천 채가 남아있고, 200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투러우는 모양만 봐도 방어용 구조물이다. 혼란의 시대에 비적(匪賊)의 습격을 막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평화 시기에도 많이 지어졌다. 방어 대상이 전형적인 비적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여러 인구집단 사이의 긴장 관계를 이 보루형 건축 형태의 배경으로 본다. 영남지역의 동부 푸젠·광둥 일대에는 서부의 광시(廣西)·원난(雲南)·구이저우(貴州)에 비해 소수 민족이 적은 반면 한족 중 언어·풍속·산업 전통을 달리하는 여러 갈래 민계(民系)가 오랫동안 뒤얽혀 있었다.

4세기부터 북방서 내려온 ‘외래인’
주류 세력과 맞서며 ‘남중국’ 닦아

송나라 이후 경제 부흥에 큰 역할
20세기 중국 출범, 화교 이주 앞장

성채 모양의 독특한 가옥 ‘투러우’
여러 집단 사이의 긴장감 보여줘

‘중국’에 뒤늦게 편입된 영남지역

마치 요새나 성채를 닮은 중국 영남지역의 주택인 투러우(土樓). 정착인과 이주민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사진 위키피디아]

마치 요새나 성채를 닮은 중국 영남지역의 주택인 투러우(土樓). 정착인과 이주민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사진 위키피디아]

회하(淮河)를 기준으로 북중국과 남중국을 가르는데, 장강 유역이 오랫동안 남중국의 본체였다. 더 남쪽 남해안 일대 영남지역은 12세기에 송나라가 남쪽으로 밀려 내려오면서 남방 개발이 가속될 때까지 생산력도 약하고 인구도 적은 변방이었다.

춘추시대 시작된 중국 농업문명 확장의 가장 큰 방향이 남쪽이었다. 고온다습한 남방 환경이 초창기 농업에는 맞지 않아도 기술 수준 향상에 따라 더 큰 생산력을 바라볼 수 있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북방에서 남방으로 인구 이동이 끊임없이 진행되었고, 남북조시대나 남송시대처럼 북방의 압력이 강한 시기에는 그 흐름이 불쑥불쑥 커지곤 했다.

영남지역 방언은 우리 한자 발음과 비슷한 편이다. 내 이름(한자 金基協)을 광둥어로 “깜끼힙!” 부르면 관화(官話)의 “진지셰”보다 알아듣기 쉽다. 중국 중심부에서 발음체계가 꾸준히 변해오는 동안 주변부에서는 당·송 시대에 전해진 발음체계가 크게 바뀌지 않은 결과다. (어휘도 마찬가지다. 학까어에서 먹고 마시는 것을 옛날대로 ‘食(식)’ ‘飮(음)’이라 하고, 지금 관화에서 그 뜻으로 쓰이는 ‘吃(흘)’과 ‘喝(갈)’은 말을 더듬는다는 뜻, 목마르다는 뜻으로 쓴다.)

남중국의 대부분 민계들은 정착 지역의 이름을 내세운다. 각 지역의 주류집단이 된 이들을 ‘뿐띠(本地·Punti)’라 하는데, 이와 대비되는 ‘외래인’이란 뜻의 ‘학까(客家·Hakka)’가 있다. 학까계는 넓은 지역에서 비주류로 존재해 왔다. 오랜 기간에 걸쳐 북방의 다양한 지역에서 이주해 온 것은 마찬가지인데 왜 뿐띠와 학까의 차이가 생겼을까.

한족의 남방 이주 과정에 어떤 메커니즘이 지속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각 지역 주류사회가 자리 잡은 후에 유입된 집단 중 순조롭게 편입되지 못하는 집단들이 ‘학까’의 범주를 이루게 된 것으로 보인다. 주류사회에 비해 이동성이 큰 이 집단들이 영남지역 전체를 무대로 하나의 문화적 정체성을 세운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민간의 독자적 방위력, 왜 필요했나

투러우 군락. [사진 위키피디아]

투러우 군락. [사진 위키피디아]

학까계와 주변세력 사이의 갈등이 가장 크게 폭발한 사례가 뿐띠-학까 전쟁(1855~1867)이다. 학까계가 주동이 된 태평천국의 난(1850~1864) 여파로 일어난 이 참혹한 전쟁에서 백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 후 학까계를 둘러싼 갈등이 가장 널리 드러나 온 곳은 타이완이다. 타이완의 한족 집단은 일본 점령기 이전부터 거주한 본성인(本省人)과 해방 후에 국민당을 따라 들어온 외성인(外省人)으로 구분된다. 본성인 중 민난(閩南)계가 주류고, 학까계가 그 다음으로 큰 집단이다. 두 집단 모두 가까운 푸젠성에서 건너왔다.

투러우 내부 모습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투러우 내부 모습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타이완에서 두 집단의 적대관계는 대륙에서부터 이어진 것이다. 학까계와 민난계의 대립은 푸젠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친 광범한 현상이었다. 지금 대륙보다 타이완에서 그 대립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대륙에서 민계 간 갈등 자체가 완화된 것이고, 또 하나는 갈등을 감추려 드는 대륙의 정치 분위기다.

『춘추』에는 규모가 법도를 넘는 대부(大夫)들의 성곽을 제후(諸侯)의 명령으로 무너뜨린 일들이 적혀 있다.(대부는 제후의 신하였다) 대부의 성곽이 너무 튼튼하면 외부 침공만이 아니라 여차하면 제후에게도 맞설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민간의 독자적 방위력 제한은 치안의 기본 원칙이었다.

치안력이 약한 곳에는 성벽을 두른 ‘채(寨)’가 널리 지어졌다. 치안력이 약하다 함은 외부의 위협만이 아니라 민간의 세력경쟁을 국가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도 가리키는 것이다. 학까계가 발전시킨 투러우 건축 형태는 국가의 보호가 부족한 지역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

‘국가’의 힘이 압도적이지 않은 상황

이런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 하나가 제임스 스코트의 『통치를 피하는 재간』(The Art of Not Being Governed, 2009)이다. 중국 서남단에서 인도 동북단에 이르는 동남아시아 산악지대에서 지형조건이 정치조직의 전개 과정에 끼친 영향을 분석했다.

많은 농민의 일률적 통제가 가능한 평야에는 국가가 쉽게 세워진다. 국가의 존재는 주변에 압력을 가한다. 이 압력에 저항하거나 회피하는 과정에서 산악지대 주민들의 존재방식에 일어나는 온갖 형태의 변화를 스코트는 그려낸다.

스코트는 ‘역사발전의 법칙’에 대한 과신을 버릴 것을 권한다. 정착농경에서 화전민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대규모 정치조직을 풀고 씨족사회로 돌아가기도 한다. 심지어 문자를 사용하다가 버리는 사회도 있다. 소수의 사람들이 어쩌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겪는 일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널리 이뤄진 선택이라는 것이다.

법칙성의 과신은 근대인의 약점이다. 변화의 추세를 개인이나 소수집단이 거스르기 힘든 것이 근대적 상황의 특성이다. 역사를 살필 때는 법칙성을 섣불리 적용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법칙성도 특수한 상황조건에 국한된 것으로 판명될 수는 없는 것인지 역사의 거울에 비쳐보는 것이다. 자연과학의 ‘반증가능성(refutability)’ 확인과 같은 과정이 역사학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동남아시아가 중심이지만 중국의 서남쪽 모퉁이도 시야에 들어 있다. 그 연장선 위에서 중국의 영남지역 전체를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영남지역의 자연조건은 스코트가 ‘조미아(Zomia)’라 부르는 산악지대와 비슷한 곳이 많다. 조미아에서 나타난 것과 비슷한 현상이 그에 앞서 광둥·푸젠의 산악지대에서도 많이 나타났을 것 같다. 광둥·푸젠에 소수 민족이 적은 것은 한화(漢化) 과정이 더 먼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엉치가 가벼웠던” 학까계의 활약

현대사를 밝힌 학까계 명사들

현대사를 밝힌 학까계 명사들

남북조시대 이후 영남지역은 중국인에게 ‘신대륙’이었다. 우월한 생산기술과 전투기술을 가진 이주민 앞에서 원주민들은 동화하거나 소멸하거나 험하고 외진 곳으로 옮겨가야 했다. 동화한 원주민은 이주민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여 이주민사회에 편입되었다.

이주민 집단 중에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한 집단들은 정착 지역의 주인이 되었다. 아메리카 이주민이 아메리칸이 되고 남아프리카의 아프리카너가 아프리카인을 자처한 것처럼. 한편 평야에 자리 잡지 못한 집단들은 비주류로서 독특한 생활양식을 만들어냈다. 학까계는 비주류 집단들의 광역 네트워크였다.

할머니들은 민첩하고 부지런한 아이를 “고 녀석 엉치가 가볍다”고 놀리듯 칭찬했다. 정착성이 약했던 학까계는 엉치가 가벼웠고 새로운 일에 적극적이었다. 천지회(天地會)·삼합회(三合會) 등 비밀결사와 해외 이주에 앞장선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영남지역의 민간 역량을 키워낸 밀무역 등 법외(法外) 활동에서 역할도 앞으로 많이 밝혀질 것을 기대한다.

중국 인구의 3% 전후를 점하는 비율에 비해 현대사에서 학까계의 역할은 엄청나게 컸다. 태평천국과 장정(1934~1935)의 주력이 모두 학까계였다. 장정 출발 당시 공산당 본부가 있던 루이진(瑞金)은 학까계 지역이었고, 장정에 나선 공산군 8만6000여 명의 70%가 학까계였다. 주더(朱德)·예팅(葉挺)·예젠잉(葉劍英) 등 학까계 장군들이 두각을 나타낸 배경이다.

학까계의 현재 모습도 흥미롭지만 그 과거가 더 궁금하다. 남중국의 근대 민간 질서를 밝히는 것은 ‘중화제국’의 실제 모습을 찾기 위한 중요한 과제다. 투러우 같은 건축 형태가 필요했던 이유에서부터 생각을 시작해 본다.

김기협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