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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전자눈’으로 세상 밝힌다…반도체 엔지니어의 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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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43〉 김정석 셀리코 대표

셀리코를 세운 김정석 가천대 의공학과 교수는 이미지센서 이식으로 시각장애인의 시력을 회복시키는 ‘마이크로 전자눈’ 기술을 개발했다. 우상조 기자

셀리코를 세운 김정석 가천대 의공학과 교수는 이미지센서 이식으로 시각장애인의 시력을 회복시키는 ‘마이크로 전자눈’ 기술을 개발했다. 우상조 기자

1970년대 동양방송(TBC)에서 방영했던 인기 외화시리즈 ‘600만불의 사나이’는 불의의 사고를 당한 오스틴 대령이 첨단기술이 적용된 눈·팔·다리 등을 이식받은 뒤 악당들과 맞서는 스토리다. 오스틴 대령은 눈을 이식받아 천리안과 야시(夜視)능력 등을 갖게 된다. 인간의 신체적 결함을 첨단 기술로 보완하는 건 공상과학(SF) 드라마·영화에서만 나올법한 이야기가 더는 아니다.

‘괴짜 기업인’으로 유명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2016년 세운 ‘뉴럴링크’가 대표적이다. 인간의 뇌에 칩을 삽입해 생각만으로 각종 기기를 제어하고, 인공지능(AI)을 통해 사람의 지능을 높이겠다는 원대한 꿈을 내세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지난해 말 뉴럴링크의 인간 대상 실험 신청을 거절하면서 머스크의 꿈은 미뤄졌지만, 불가능을 향한 인간의 도전은 계속될 전망이다.

전맹 시각장애인에 센서 이식
0.2 정도의 시력 회복이 목표
황반변성 등 실명 환자에 희망
반도체 소형화로 가능성 열려

김정석(47) 가천대 의공학과 교수는 망막 시각세포 손상으로 빛조차 인지 못하는 전맹(全盲) 상태의 시각장애인에게 이미지센서를 이식해 시력을 회복시키는 도전을 하고 있다. 그간 연구했던 ‘마이크로 전자눈’ 기술을 바탕으로 2019년 셀리코를 창업하면서다. 지난 7일 경기 성남시 판교창조경제밸리 셀리코 본사에서 만난 김 교수는 “심청이가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지 않도록 우리가 대신 몸을 던지고 있다”며 “심청이 기업이 되는 게 목표”라고 웃었다.

최첨단 반도체로 시신경 연결

“황반변성증 등의 질환에 걸리면 빛을 감지하는 시세포층이 손상돼 시력을 잃는 경우가 있어요. 시신경의 고리가 끊어져 빛을 전기신호로 바꿔주지 못하는 것이죠. ‘전자눈’ 기술은 손상된 시각세포층에 이미지센서 칩을 삽입해 끊어진 시신경의 다리를 다시 놔주는 겁니다. 최첨단 반도체 칩이 1억여개의 시신경 역할을 하는 것이죠.”

망막은 여러 세포층으로 구성된 눈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막이다. 황반변성은 망막의 중심부에 있는 시신경 조직인 황반에 비정상적인 혈관이 생기며 중심시(중심부를 보는 시력)를 잃게 하는 질환이다.

최근 국내에서 환자 수가 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18년 17만7355명 수준이던 황반변성 환자 수는 2021년 36만7463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미국 시카고대 의대는 지난해 발표한 논문에서 미국 내 40대 이상 인구 중 2000만명가량이 황반변성을 겪고 있으며, 노인 실명의 최대원인이 노인성 황반변성이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현재는 약물 등으로 황반변성 치료에 나서고 있지만, 비가역적 질환이라 한번 시력을 잃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며 “세계 연구진들이 카메라 이미지센서를 넣어 해결하려 노력해왔다. 이미지센서가 반도체 칩이기 때문에 손상된 망막에서 빛을 감지해 세포층을 자극하는 전기신호를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머리카락 굵기’ 칩 망막에 이식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셀리코의 ‘전자눈’은 크게 망막에 이식하는 이미지센서 칩과 증강현실(AR) 안경 등으로 구성돼있다. 먼저 이미지센서 칩은 망막을 절개한 뒤 시각세포층에 이식해야 하므로 ‘소형화’가 가장 중요한 기술로 꼽힌다. 김 교수는 “눈의 수정체가 볼록렌즈 역할을 하는데, 빛이 들어와 상이 맺히는 크기가 가로·세로 5㎜에 불과하다”며 “간섭 현상을 억제하면서 전극기술을 넣어야 하는데, 이미지 센서 칩 크기를 3㎜×4㎜에 두께는 머리카락 굵기인 100마이크로미터(㎛) 정도로 작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걸 망막에 이식한 뒤 면역거부나 염증 반응이 일어나면 안 되므로 코팅기술과 전력공급 기술 등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AR 안경은 망막에 이식한 ‘전자 눈’에 무선으로 전력을 공급하고 홍채 기능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김 교수는 “배터리를 눈에 이식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래서 휴대폰 무선충전 기술을 적용해 안경을 쓰면 ‘전자눈’이 자동으로 충전되도록 했다”며 “특히 어두운 곳과 밝은 곳을 오갈 때 홍채의 크기가 바뀌는데, 시각장애인들은 이 기능이 떨어져 있다. 안경에 카메라·디스플레이 장치를 적용해 실내·외 어디서라도 일정한 조도로 앞을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말했다.

‘전자눈’으로 보는 세상은 어떨까. 김 교수는 “전맹 환자가 흑백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며 “현재 256픽셀가량인 해상도를 2000픽셀까지 높일 계획”이라고 말한다. 이 경우 최대 유효 시력은 0.2 정도. 흑백이지만 큰 글씨를 볼 수 있는 수준은 된다는 설명이다.

김진국 비앤빛강남밝은세상안과의원 대표원장은 “일반적으로 시각장애인은 직업을 갖거나 사회적 활동을 하는 게 쉽지 않은데, 0.2 정도라도 시력을 회복하면 사회생활이 가능해진다”며 “셀리코가 초기 어려운 단계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시각장애인들에게 희망이 될 것으로 본다. 평균수명이 늘어날수록 시력은 더 중요해진다”고 말했다.

반도체 엔지니어의 도전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김 교수는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엔지니어로 일하며, D램 등 메모리반도체 설계를 담당해왔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서던캘리포니아대와 UC산타크루즈에서 석·박사를 마쳤다. 대학원 시절부터 인공 망막 등의 연구를 이어왔다. 그는 “고교 친구 아버지가 사고로 전신 마비가 됐는데, 그때 끊어진 신경을 다시 연결할 수 없을까 생각하며 신경 복원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사실 반도체의 성질을 이용해 끊어진 신호를 연결하는 ‘전자눈’의 핵심 아이디어는 1950년대에 나왔어요. 하지만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구현이 불가능했죠. 90년대 넘어 반도체 소형화 기술이 주목받으며 점차 현실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어요. ‘반도체를 작게 만드는 건 자신 있다’는 생각에 저도 도전하게 된 것이죠.”

가천대 교수로 부임한 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의 지원을 받아 ‘전자눈’ 연구를 본격화했다. 창업을 결심한 건 연구성과가 논문이나 특허로만 끝나는 것에 아쉬움을 느껴서였다. 김 교수는 “대부분 엔지니어는 ‘기술을 통해 인간의 삶을 널리 이롭게 하자’는 홍익인간 사상을 갖고 있다”며 “직접 창업하고 기술을 상용화해 일반인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CES혁신상, 에디슨어워드 수상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김 교수는 “인공눈은 뇌에 가까운 시신경에 이식하게 되므로 ‘4등급 의료기기’로 분류돼 규제가 까다롭다”며 “국내 첫 시도이다 보니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간 성과도 있었다. 올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쇼(CES) 2023’에선 혁신상을 받았고, 오는 4월 ‘2023 에디슨어워드’(2023 Edison Awards) 수상 기업에도 선정됐다. 이 상은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87년 제정됐다. 현재는 동물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안전성 확보 등의 과정을 거쳐 내년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다.

시장조사업체 데이터브릿지에 따르면 이식형 인공눈 글로벌 시장은 2028년 4억2585만 달러(약 5634억원)까지 성장할 전망이다. 현재 프랑스 픽슘비전, 호주 바이오닉비전테크놀로지 등이 선두를 달리고 있다. 셀리코에 투자한 박상현 유안타인베스트먼트 이사는 “미국·프랑스 등의 선행 제품은 해상도가 낮은데, 셀리코의 목표 해상도는 2000픽셀이므로 기술적 경쟁력을 갖췄다”며 “실명은 본인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손실인데, 가치 있는 기술이라 판단했다. 타깃이 되는 황반변성증·망막색소변성증 환자 수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늘어나는 추세라 비즈니스적으로도 사업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창업 선배와 네트워킹 필요”

김 교수는 국내 창업 활성화를 위해 정부의 지원사업을 단계별로 세분화하고, ‘선배 창업자 인력풀’을 구성했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정부의 창업화 과제가 한 사업에 묶여 있는데, 시제품개발·마케팅 등 창업자에게 단계별로 필요한 자금을 세분화했으면 한다”며 “창업자들이 진짜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불필요한 사업 수주 경쟁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기술 창업에 처음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경험입니다. 저는 청각장애인 의료기기를 만드는 선배 창업자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소재 선정 등에 있어서 다양한 기술을 전수 할 수 있었죠. 꼭 성공한 창업자가 아니어도 돼요. 실패한 창업자라도 배울 게 많습니다. 초기 창업자와 선배들의 네트워킹 장이 만들어지면 창업 생태계가 더 탄탄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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