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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주정완의 시선

개혁 의지 실종된 국민연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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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주정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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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노후자금이 1년 만에 약 80조원이나 쪼그라들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최근 발표한 지난해 국민연금 기금의 평가손실이다. 연간 수익률은 마이너스 8.22%를 기록했다. 1999년 기금운용본부 출범 이후 최악의 성적표다.

기금운용본부의 입장은 뜻밖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다’라는 얘기다. 기금운용본부는 보도자료에서 “2022년은 주식과 채권 시장이 동시에 하락한 이례적인 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해외 연기금들의 운용 수익률도 글로벌 증시 급락 등의 영향으로 하락했다. 주요 연기금 중 국민연금의 성과는 상대적으로 양호하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기금 평가손실 약 80조
민간자문위 합의안 마련 실패
예고된 재앙 반드시 막아내야

비유하면 이런 식이다. 어떤 학생이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왔다. 그는 성적이 떨어진 이유를 이렇게 변명한다. “국어와 수학이 동시에 어려웠던 시험은 이례적이다. 점수가 떨어진 건 시험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지 공부를 안 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변명이 전혀 터무니없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너무 순진하다. 실제로 지난해 글로벌 금융시장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국민연금으로선 투자 수익을 내는 데 불리한 여건이었다. 다만 유리한 요소도 없지 않았다. ‘킹달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달러 가치가 급등한 점이다. 국민연금 수익률은 원화로 계산한다. 정확한 금액은 알 수 없지만 국민연금은 지난해 해외 투자에서 상당한 환차익을 냈을 것이다.

개인의 노후자금이 이렇게 ‘펑크’를 냈다면 그 집은 난리가 났을 게 뻔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반응은 생각보다 차분하다. 국민연금 가입자 중에는 수십 년 뒤에나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청년 세대도 적지 않다. 이들에겐 당장의 연금 수익률이 피부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연금 수익률 악화는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연금 고갈 시기를 더욱 앞당기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지난 1월 발표한 재정추계에 따르면 2055년이 되면 국민연금 기금은 완전히 바닥난다. 1990년생이 국민연금을 받을 65세가 되면 연금 기금이 한 푼도 남지 않는다.

2018년 추계와 비교하면 고갈 시기가 2년 빨라졌다. 이대로 가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예고된 재앙’이다. 그나마 매년 꾸준한 수익률을 낸다는 기본 전제가 깨지면 재정추계도 원점에서 다시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 편향 논란이 있는 검찰 출신 한석훈 변호사가 기금운용위원회 상근 전문위원을 맡은 건 좋지 않은 신호다. 한 변호사는 자신의 책(『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재판 공정했는가』)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옹호하면서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과 대법원의 유죄 판결은 부당했다고 주장했다. 개인으로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수 있겠지만 공직자로선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한 변호사는 국민연금 의결권에 대해서도 법원 판례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2019년 발표한 ‘연기금의 주주 의결권 행사와 배임죄’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그는 논문에서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의 ‘독립성 원칙’을 부정했다. 그러면서 “원래 기금의 관리·운용 책임을 맡은 보건복지부가 정당한 지시나 지도를 한다면 공단(국민연금공단)은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인물이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전문위원을 맡는 게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여야 정치권은 입으로는 연금 개혁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총대’를 매고 개혁을 추진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국회는 지난해 10월 연금개혁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연금특위는 민간자문위원회에 연금 개혁안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지금까지 논의 진행을 보면 실망스럽다. 국회 연금특위는 지난 1월 3일 이후 두 달 넘게 회의 한 번 열지 않고 있다. 민간자문위에선 전문가 의견이 엇갈리면서 합의안 마련에 실패했다. 이러다간 특정한 방향성 없이 여러 의견을 취합한 수준의 ‘맹탕 보고서’가 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제는 남은 시간이 정말 없다. 2007년 노무현 정부에서 국민연금을 부분적으로 개혁한 지 벌써 16년이 지났다. 당시 연금 개혁을 추진했던 유시민 전 복지부 장관은 “개혁을 하루 늦추면 늦추는 만큼 나중에 사고가 터질 때 폭발력이 커진다. 우리 딸·아들·손자·손녀들의 삶은 쓰나미와 같은 충격에 휩쓸릴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적 입장이나 진영을 떠나 백번 맞는 말이다. 부디 이번만큼은 정부와 정치권이 정치적 이해득실을 내려놓고 미래 시대에 대한 책임감으로 개혁에 나서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