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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거리의 일상을 정치 공해 전쟁터로 만든 정당 현수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정치 혐오 부추기는 낯 뜨거운 내용 무차별 살포

철거도 불가능해 시민 혐오 가중, 당장 규제해야

여야 정당들이 무차별 비방과 인신공격으로 가득찬 현수막을 전국 곳곳의 길거리에 내걸어 극도의 짜증과 고통을 유발하고 있다. 대한민국 온 동네가 여야의 대리 전쟁터가 된 형국이다. 지난해 12월 더불어민주당 의원 3명이 대표 발의해 통과된 옥외광고물관리법(8조) 개정안이 발효되면서 지자체 허가 아래 지정된 곳에만 걸 수 있었던 정당 현수막이 아무 곳에나 15일간 자유롭게 걸릴 수 있게 된 때문이다. 법 개정은 “통상적인 정당 활동을 보장한다”는 취지였지만, 여야가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현수막은 통상적인 정당 활동과는 거리가 먼 상대당 비방이 대부분이다. ‘죄지었으면 벌 받아야지’(국민의힘), ‘(곽상도·김건희 사진 게재) 죄지어도 벌 안 받더라’(민주당) 등 아이들 보기 민망할 만큼의 공방 수준이다. 급기야 민주당 중앙당이 윤석열 정부의 강제징용 배상 해법을 ‘이완용의 부활’에 비유한 현수막을 내려보내자 민주당 수도권 의원들이 “너무 살벌하고 자극적”이라며 게시를 거부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이렇게 현수막 공해가 도를 넘으면서 지방자치단체마다 “당장 현수막을 철거해 달라”는 민원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현수막이 신호등이나 가게 간판을 가리고 운전자들의 시야를 분산시켜 사고 위험이 커지고 영업에도 지장이 크다는 하소연이 줄을 잇는다. 킥보드를 타던 대학생이 현수막 끈에 목이 걸려 다치는 사고가 일어난 인천시는 조례를 개정해 현수막 규제에 나섰고, 종로구청 한 곳에만 하루 평균 10건의 민원이 접수되는 서울시도  각 정당이 동마다 1개 현수막만 걸도록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하지만 이런 조치들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권고에 불과해 여야가 법을 핑계로 현수막 게시를 밀어붙이면 막을 방법이 없다. 게다가 8월부터는 선거일 180일 전부터 유권자의 1인 선거 현수막 게시가 가능해져 현수막 공해는 더욱 기승을 부릴 전망이다. 정당들은 현수막 게시에 무한대의 자유를 누리는 반면, 일반인은 지자체의 허가를 받아 지정된 곳에만 게시할 수 있으니 형평성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여야는 도시 미관을 해치고, 사고 위험을 높이며, 정치 혐오를 부추기는 현수막을 묻지마식으로 살포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해야 마땅하다. 흉물이 돼버린 정당 현수막은 하나 만드는 데 10만원이 들어간다. 이 비용은 국고보조금이나 정치후원금으로 충당되니 세금 낭비도 엄청난 셈이다.

여야는 현수막 게시를 원칙적으로 자제하고, 꼭 현수막을 통해 알릴 사안이 있다면 일반인과 똑같이 지자체의 허가를 받은 뒤  지정 게시대에만 걸도록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법을 재개정해 현수막 게시를 엄격히 규제하는 게 정치 공해에 시달려 온 시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