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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언론·시민단체 족쇄법 추진…"러시아식 악법" 반대 시위

중앙일보

입력

구소련 국가 조지아(러시아명 그루지아) 의회가 외국 자금의 지원을 받는 언론·시민단체를 ‘외국 대리인’으로 등록하도록 요구하는 법률안(외국 대리인법) 처리를 강행하자, 이에 반대하는 조지아 시민 수만 명이 이틀째 의회 앞에 몰려와 규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조지아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과 물대포를 쏘며 강경 진압에 나섰다.

8일(현지시간)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경찰이 최루탄과 물폭탄을 쏘며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있다. AFP=연합뉴스

8일(현지시간)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경찰이 최루탄과 물폭탄을 쏘며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있다. AFP=연합뉴스

8일(현지시간) BBC·CNN 방송과 가디언 등에 따르면, 이날 조지아 수도 트리빌리에 위치한 의회 앞엔 수만 명의 시위대가 모여 “러시아식 악법에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조지아 국기와 함께 성조기와 유럽연합(EU) 깃발, 우크라이나 국기를 흔들며 의회에 돌멩이와 화염병을 던지며 “우리는 조지아인이다. 당신들은 러시아인이냐”며 법안 철회를 촉구했다.

경찰은 의회 밖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해산을 명령했지만 격앙된 일부 시위대가 바리케이트를 무너뜨리자 물대포와 최루탄을 쏘며 강경 진압했다. 일부 시위대는 물대포에 맞아 바닥에 쓰려졌고, 최루탄 가스에 고통스러워했다. 조지아 정부는 시위대와 충돌로 경찰관 50명이 다쳤고 장비가 파손됐다고 밝혔다. 시위에 참여한 야당 지도자를 포함해 66명이 체포됐고 이들 중 일부는 경찰에 구타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9일(현지시간) 트빌리시의 국회의사당 근처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체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9일(현지시간) 트빌리시의 국회의사당 근처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체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번 시위는 전날 조지아 의회에서 집권당 ‘조지아의 꿈’이 지지하는 외국 대리인법이 1차 독회(심의)를 통과하면서 촉발됐다. 추가 독회까지 통과하면 법률로 제정된다. 이렇게 되면, 외국에서 20% 이상의 자금을 지원받은 언론매체나 비정부기구(NGO)는 정부에 ‘외국의 영향을 받는 대행기관’으로 등록해야 한다. 등록하지 않은 단체나 개인은 9600 달러(약 1267만 원)의 벌금과 최대 5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

특히 이 법안의 주요 골자는 2012년 러시아가 2012년 제정한 외국 대리인법과 유사하다.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재집권하면서 이 법을 제정했고, 해외 자금을 받아 정치활동에 참여한 단체를 외국 대리인으로 등록해 엄격히 통제했다. BBC는 러시아 정부는 이 법을 통해 언론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고 시민사회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트빌리시에서 시위대가 성조기와 유럽연합 깃발을 들고 '외국 대리인법'에 반대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트빌리시에서 시위대가 성조기와 유럽연합 깃발을 들고 '외국 대리인법'에 반대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조지아 시민들은 해당 법안이 실제 시행되면, 미국과 유럽의 지원을 받는 독립언론과 시민단체를 정부가 손쉽게 통제할 수 있어, 조지아의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권위주의로 회귀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특히 언론 통제로 조지아의 여론이 친(親)러시아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고, 이는 조지아의 EU 가입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EU 역시 해당 법안이 EU 가입에 불리하다고 경고했다. 호세프 보렐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성명을 통해 “이 법은 EU의 가치와 기준에 맞지 않는다”며 “EU에 가입하려는 조지아의 명시적 목표에 어긋나며 이를 최종 채택하면 EU와의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밝혔다. 네드 프라이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이 법안에 투표하는 사람은 조지아와 유럽 및 서방의 관계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지아는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몰도바와 함께 EU 가입을 신청했다. EU는 지난해 7월 심사를 거쳐, 우크라이나와 몰도바엔 정식 후보 지위를 부여했고 조지아엔 내정 개혁 의견을 제시하며 미뤄둔 상태다. 조지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EU 가입 추진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으며, 국민 여론도 80%가 지지하고 있다.

해당 법안을 추진 중인 그룹은 집권당인 조지아의 꿈이다. 싱크탱크인 유럽외교협의회(ECFR)는 지난해 12월 “집권당이 최근 조지아를 서방에서 떨어뜨려 점진적으로 러시아의 영향권으로 옮겨가려는 일련의 움직임을 보여왔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이어 “조지아의 전 총리이자 억만장자인 비지나 이바니쉬빌리가 친러 행보의 중심축”이라고 지적했다.

이라클리 가리바슈빌리 조지아 총리(왼쪽)가 지난해 루마니아 대통령궁에서 루마니아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이라클리 가리바슈빌리 조지아 총리(왼쪽)가 지난해 루마니아 대통령궁에서 루마니아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미국을 방문 중인 살로메 주라비쉬빌리 조지아 대통령은 “조지아는 유럽에서 미래를 보며 이런 미래를 빼앗을 권리를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것”이라며 “의회에서 이 법이 통과되더라고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의회내각제인 조지아에선 총리가 대통령의 거부권을 뒤집을 수 있다. 이라클리 가리바슈빌리 조지아 총리는 법안을 지지하며 이 법이 “유럽과 국제 표준에 부합한다”고 밝힌 바 있다.

ECFR은 현재 조지아 상황을 러시아에 침공당한 우크라이나와 유사하다고 분석하며 “러시아가 조지아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은 우크라이나에 침공한 것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단일 제국 프로젝트’의 일부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벨기에 단체 카네기유럽(Carnegie Europe) 관계자는 “조지아 민주주의가 현재 위태로운 상황”이라면서 “정치적 격동기를 겪는 조지아가 ‘중대한 순간’에 직면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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