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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범 돌려보내면 안되나"…'귀순요청' 글자 삭제한 서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19년 11월 ‘탈북어민 강제북송’ 사건 때 청와대 참모들이 탈북자 두 명의 귀순 의사를 무시하고 북한에 보낸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은 당시 문재인 정부가 한·아세안 정상회의에 김정은 위원장을 초청하려던 상황에서 탈북어민 문제가 불거지자, 남북관계 경색을 우려해 적법한 논의 절차 없이 이들을 북송했다고 보고 있다.

정의용(왼쪽) 전 국가안보실장과 문재인 전 대통령, 서훈 전 국정원장. 중앙포토

정의용(왼쪽) 전 국가안보실장과 문재인 전 대통령, 서훈 전 국정원장. 중앙포토

서훈 “흉악범인데 그냥 돌려보내면 안 되나”

검찰은 지난 1일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 서훈 전 국가정보원장,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을 국가정보원법상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했다. 공소장엔 “흉악범인데 그냥 돌려보내면 안되나(서훈)” 등 강제 북송이 이뤄진 상황이 담겼다.

검찰에 따르면 탈북 어민 우모씨(22)와 김모씨(23)는 남쪽으로 내려올 때부터 귀순 의사를 밝혔다. 우리 특수부대원들이 어선을 나포해 이름과 나이, 표류 경위 등을 묻자 “귀순을 요청한다. 살기 어려워 내려왔다”고 답했다고 한다. 국정원이 주축이 돼 간첩 여부 등을 확인하는 합동조사에서도 이들은 귀순 의사를 포함한 자필 보호신청서를 써서 제출했고, 조사에 협조적인 태도로 “동료선원 16명을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이에 국정원도 “동료 살해 후 도피 목적으로 남하한 것으로 대공 혐의점은 희박하다”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검찰에 따르면 서 전 원장의 주도로 수정작업이 시작됐다. 검찰 조사 결과, 서 전 원장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북송이) 결정됐는데 ‘대공 혐의점 희박’이 뭐야?”라며 ‘귀순요청’ 글자를 삭제하고, ‘대공혐의점은 희박한 것으로 평가’ 부분을 ‘대공혐의점은 없는 것으로 결론’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이후 이들 탈북민에 대한 추가 조사 없이 서둘러 북측에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실무진들의 반대에도 북송을 밀어붙인 정황도 있다. 서 전 원장은 국정원 3차장에게 “지금 쟤들(탈북민) 16명이나 죽인 애들이 귀순하고 싶어서 온 거겠냐, 지들 살려고 온 거지. 우리는 북송하는 방향으로 조치 의견을 넣어가지고 보고서를 만들어줘”라고 지시했다. 3차장이 “대공수사국 설득이 가능하겠습니까? 두 번이나 실무부서에서 반대한 것을”이라며 의문을 제기하자, 서 전 원장은 “그냥 해. 우리는 그냥 그 의견을 내”라고 말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후 보고서엔 “진정한 귀순으로 보기 어렵고, 희대의 살인범으로 우리 정부가 보호해야 할 가치가 없다”,“귀순을 허용할 경우, ‘보호할 가치도 없는 중대범죄자의 귀순도 허용하느냐’는 일반 국민의 법감정과 충돌할 가능성이 다분하다”,“선박과 함께 신병을 북한으로 송환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내용이 추가됐다. 이후 탈북민들은 남하 5일만인 2019년 11월 7일 판문점을 통해 추방됐다.

“탈북민 송환으로 북한 존중 보여주기로”

2019년 11월 7일 판문점에서 탈북어민 2명이 북송되고 있다. 검찰은 공소장에 "판문점으로 간다는 사실을 고지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만 말해 기망하여 안심시켰다"고 적었다. 사진 통일부

2019년 11월 7일 판문점에서 탈북어민 2명이 북송되고 있다. 검찰은 공소장에 "판문점으로 간다는 사실을 고지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만 말해 기망하여 안심시켰다"고 적었다. 사진 통일부

 검찰은 정의용 전 실장, 서훈 전 원장, 노영민 전 실장 등이 같은 상황인식을 하고 강제북송을 공모했다고 보고 있다. 노 전 실장이 강제북송 여부에 대해 결정을 하면, 정 전 실장이 최종 승인하는 방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서 전 원장은 강제북송에 걸맞은 합동조사 결과를 도출하고, 통일부는 북송 절차를 실행하는 역할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던 상황에서 이 문제가 걸림돌이 될 가능성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범행 동기로 “(탈북민을) 송환함으로써 북한과 화해와 협력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북한을 존중하고 있다는 의지를 보여주기로 한 방침”을 꼽았다.

검찰은 청와대 내부에서도 강제북송 근거가 부실하고, 법적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탈북민들이 나포된 지 이틀 뒤 “북한 이탈주민은 헌법상 대한민국 국민이어서 범죄행위로 추방하려면 난민법을 적용해야 하지만, 북한에 대해선 난민법 적용이 불가(법무비서관실)”,“법률적 근거 없이 송환할 경우 논란 발생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정부 입장을 우선 마련할 필요(국가위기관리센터)” 등의 보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 전 실장 등은 “해당 탈북민들은 동료 선원 16명을 살해한 범죄자”라며 “희대의 엽기적 살인마들로 애초에 귀순할 의사가 없었다. 법과 절차에 따라 국민 보호를 위해 최선의 결정을 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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