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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민의 퍼스펙티브

“대통령 의지 있다면 총선 앞둔 지금이 개헌 논의 적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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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정민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역대 국회의장이 말하는 개헌의 성공 방정식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윤석열 대통령이 올 초 ‘중대선거구제 개편’을 언급하면서 정치 개혁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국회의원 전원위원회를 통한 선거제도 개편 ▶21대 국회 임기 내(2024년 5월) 개헌이란 시간표를 제시하며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의장 직속으로 동시 출범한 정치개혁특위와 개헌 자문위(헌법 및 정치제도 개선 자문위)에서 국회의원 정수, 선거구제, 비례대표 선출 방식 등에 대한 세부안이 마련되면 국회의원 전원이 참석하는 전원위원회의 난상토론과 기명투표를 통해 최종안을 도출한다는 복안이다.

정치불신 증폭, 총선승부 불투명
‘제왕적 대통령’ 권한 분산 호기

30년 만의 기회 방기한 문 정부
적폐 수사 집중하며 궤도 이탈

차기 주자 부상 땐 개헌 불가능
“승자독식 정치구조 언제까지…”

‘선거제 개혁→헌법 개정’ 지지부진

승자 독식 정치는 승복하지 않는 풍토를 낳는다. 친 민주당 성향 단체가 대통령 퇴진 집회를 하고 있다. [뉴스1]

승자 독식 정치는 승복하지 않는 풍토를 낳는다. 친 민주당 성향 단체가 대통령 퇴진 집회를 하고 있다. [뉴스1]

‘전원위’는 새로운 발상이다. 여야 원내대표 간 합의 사항이 각 당으로 돌아가선 의원들의 반대에 부닥쳐 무산된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것이다. 선거제도 개혁에 성공하면 그 동력으로 헌법 개정이 가능할 것으로 김 의장은 보고 있다.

그러나 아직 개혁의 돌풍은커녕 미풍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전당대회 후유증,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둘러싼 내분 등 여야 모두 집안 사정이 복잡해서다.

대의정치가 수축하면 장외세력의 원심력이 커진다. 나라는 저출산 고령화, 경제, 외교, 국방 등 복합 위기의 쓰나미에 무방비로 놓여 있는데, 정치는 순기능은 거의 상실한 채 정권 탈환을 노린 진영 전쟁에 혈안이 돼 있다. “승자독식의 정치 구조를 깨는 개헌을 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정세균 전 국회의장)는 경고음이 높아지는 이유다.

개헌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다. 국민 여론, 신구 권력, 정치인들 간의 이해가 층층이 얽힌 난관을 돌파해야 한다. 2000년대 들어 역대 국회의장들이 추진했던 개헌이 실패한 건, 씨줄 날줄이 얽히고설킨 이 고리를 끊지 못해서다. 그렇다면 개헌은 불가능한 것인가, 성공 방정식은 무엇일까. 전임 의장들에게 물었다.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 실패

승자 독식 정치는 승복하지 않는 풍토를 낳는다. 보수단체 회원들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 구속을 촉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

승자 독식 정치는 승복하지 않는 풍토를 낳는다. 보수단체 회원들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 구속을 촉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대통령 4년 중임제 등을 내용으로 하는 원 포인트 개헌을 제안했다. 그러나 유력한 야당 주자이던 박근혜(“참 나쁜 대통령”), 이명박(“개헌보다 민생 전념”) 전 대통령의 반발로 동력을 잃었다. 그랬던 이명박(MB) 전 대통령도 재임 중이던 2010년 측근인 이재오 전 의원을 특임장관에 임명, 선거제도와 개헌의 국회 논의를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미래 권력으로 부상한 박 전 대통령이 반발해 무산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개헌은 국정의 블랙홀”이라며 논의를 봉쇄했지만 임기 말엔 개헌 카드를 꺼냈다. 총선 패배 후 2016년 국회 시정연설에서 “임기 내 헌법 개정”을 밝혔으나 두 달 후 탄핵당하면서 물거품이 됐다.

집권 초엔 막강한 위세의 대통령 권력이 개헌을 가로막고, 임기 말엔 차기 주자를 둘러싼 미래 권력이 걸림돌이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2008~2010년)은 “압도적 표차로 압승해 대통령이 됐는데 개헌하자니까 ‘MB 흔들기’라고 오해를 했고, 나중엔 아예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87년 헌법은 대통령 직선에만 치우쳐 정작 대통령에게 권한이 집중된 유신 잔재와 독소조항을 없애지 못했는데 이걸 바꾸지 않고선 선진 민주화로 가지 못한다”고 단언했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2014~2016년)도 “개헌은 여야 합의와 공감대가 있어야 하므로 대통령이 힘 있을 때 나서지 않으면 어렵고, 임기 말 개헌은 동력을 얻을 수 없어 물 건너가게 된다”고 돌이켰다.

개헌 골든 타임 날려버린 문재인

역대 국회의장

역대 국회의장

박근혜 탄핵으로 빚어진 권력의 진공 상태는 거꾸로 개헌의 절호 기회였다. ①대통령제의 맹점이 극명하게 드러났고 ②대선 정국은 안갯속이었다. ③국민 여론(개헌 찬성 75%)도 고조됐다. ④여야 대선 후보들 모두 개헌을 공개 약속했고, 문재인 후보는 ‘통합정부’ 공약을 들고 나왔다. 당시 정세균 국회의장(2016~2018년)은 2017년 개헌 특위를 꾸리고, 개헌안 초안까지 마련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문재인 정부는 집권하자 통합정부 약속을 저버리고 전 정권 적폐 수사로 방향을 틀었고, 야당(자유한국당)은 개헌 궤도에서 이탈했다. 여기에 쐐기를 박은 건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청와대가 느닷없이 토지공개념, 지방분권 강화 등을 담은 ‘문재인 개헌안’을 발의한 사건이었다.

정세균 전 의장은 “87년 이후 30년 만에 처음으로 여야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개헌특위를 만들어 분위기가 고조됐는데,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하는 바람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아쉬워했다. 당시 개헌특위에 참가했던 한 위원도 “문 대통령은 야당의 탄핵 동조로 집권하고도 약속과 달리 야당을 단 한 명도 등용하지 않았다”며 “개헌 약속마저 파기하는 바람에 여야 상호 불신이 더 깊어지고 국민 신뢰도 깨졌다”고 지적했다.

이 개헌안은 정의당까지 반대하면서 의결정족수 미달로 휴짓조각이 됐다. ‘문재인 개헌안’ 발의가 개헌 압박을 회피하려는 꼼수였다는 비판이 민주당 안에서도 나왔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2018~2020년)은 “4·19 직후 내각제 개헌도, 87년 대통령제 개헌도 국회에 맡겼기 때문에 서너 달 만에 합의를 이룰 수 있었다”면서 “문 대통령이 개헌안을 낼 게 아니라 국회에서 논의하라고 했으면 100% 이뤄졌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친문파의 독점욕이 30년 만의 개헌 기회를 날려버린 건 한국 정치의 오점으로 남았다. 정세균 전 의장은 “50%가 못 되는 득표로 당선된 승자가 모든 권한을 독식하고 패자는 빈손이 되는 상실감 때문에 서로 승복 못 하는 죽기살기식 정치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라고 탄식했다.

윤 대통령 “임기 손해 보더라도 개헌”

전직 의장들은 개헌 성공의 제1조건으로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최소한 방해는 말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윤 대통령은 개헌 의지가 강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국회의장단과 만나서도 “개헌과 선거법·정당법은 3개가 하나다. 함께 처리돼야 한다”며 자신이 임기 단축의 손해를 보더라도 개헌을 이뤄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복수의 관계자가 전했다. 또 “특정 지역에서 특정 정당이 독식하는 구조는 사라져야 한다”며 중선거구제와 다당제를 강조했다. 이런 인식은 국회의 개헌 논의를 재점화했다.

그간 개헌 논의는 ▶내각제 개편은 장기 과제로 돌리고 ▶대통령의 권한 분산을 우선 추진하는 쪽으로 모였다. ▶국무총리의 국회 선출 또는 복수 추천 ▶국무위원(장관급)과 법관의 인사동의제 ▶감사원의 국회 이관 등에 여야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문희상 전 의장은 “총리의 국회 선출만 이뤄져도 총리의 장관 제청권, 해임건의권이 다 살아나 힘을 갖는 총리가 되고, 자연스럽게 권력 분산이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국민 신뢰가 바닥인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에 대해 여론이 지지할 것인가, 야당이 의석 3분의 2에 육박하는 압도적 구도에서 가능할 것인가다. ‘국회의원 선거제 개편(4~5월)→내년 4월 총선·개헌 국민투표 동시 실시’ 시나리오와 관련, 국민의힘 일각에선 “개헌 논의는 하되 개헌 발의는 내년 총선 이후로 넘겨야 한다”(김형오 전 의장)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반면 국회 개헌자문위를 이끌었던 김종인 전 국민의힘 대표는 “대통령제를 그대로 놔두고 다당제 개편만 논의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반박한다.

내년 총선 이후에는 동력 떨어져

총선 이후 새롭게 정치판이 짜이면 개헌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병석 전 국회의장(2020~2022년)은 “대통령제, 소선거구제, 양당제 등 갈등을 극대화하는 ‘땅 뺏기 정치’에선 대선에 진 야당은 그날부터 정부 여당 흠집 내는 데만 골몰하게 된다”며 “이런 상황에선 국정도, 대외관계도 힘을 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의지가 있다면 큰 대의로 보나 정치 상황으로 보나 지금 개헌을 주저할 때가 아니다”고 제언했다.

박 전 의장은 “총선 후 국민의힘이 다수당이 되고 대통령 지지도가 높으면 개헌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둘 중 하나만 안 돼도 개헌 추진 동력은 약해질 것”이라고 관측했다. 문희상 전 의장도 “윤 대통령의 의지가 있다면 국회에 개헌 논의를 맡겨 문재인 대통령이 저지른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헌정 사상 아홉 차례 개헌 중 국회 발(發) 개헌은 1960, 1987년 개헌, 두 번이다. 정치에 대한 불만이 민의의 폭발로 이어져 제도를 바꾼 경우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크다. 여야 내부 분열상으로 총선에서의 승부가 불투명하다. 민의의 폭발이 개헌을 분출시킬 마그마로 작용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