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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엄석대 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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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형수 기자 중앙일보 기자
박형수 국제부 기자

박형수 국제부 기자

1987년 이상문학상을 받은 이문열의 단편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때아닌 ‘역주행’ 중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유튜브 채널에 무료 공개된 동명 영화의 댓글창엔 ‘현실판 엄석대’가 누군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줄줄이 올라오고 있다.

사실 작가는 자신이 풍자한 엄석대의 실체를 작품에 드러냈다. ‘자유당 독재가 아직은 마지막 기승을 부리고 있던 그해’ ‘석대가 물러난 지 얼마 안 되어 4·19 혁명이 있었다’는 표현 등을 통해 ‘엄석대=이승만 독재’임을 밝혔다. 다만 악역인 엄석대를 엄청난 카리스마와 매력을 뿜어내는 마성의 캐릭터로 그려내, 출간 당시 “독재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희대의 악역 엄석대, 그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한병태로 선악 구도가 선명한 얘기 같지만, 사실 이 소설 속 진짜 빌런(악당)은 따로 있다. 교무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장기나 두며 소일하다, 자습 관리나 청소 검사는 물론 급우들의 시험지 채점까지 엄석대에게 일임하는 무기력한 5학년 담임 교사가 대표적이다. 그가 학생 관리와 지도라는 교사의 의무를 방기한 만큼 엄석대의 권력은 커지고 정당화됐다.

6학년 담임을 맡은 젊은 교사는 영웅을 가장한 빌런이다. 엄석대의 비리를 잡아내 모질게 매질하고, 그의 악행에 동조한 우등생들을 줄줄이 벌세운다. 1번부터 차례로 엄석대의 악행을 잘못을 발표하게 시킨 뒤 “다 똑같은 놈들”이라 호통치고 전원 손바닥을 때린다.

젊은 교사는 자신만이 진실과 자유의 고결한 화신인 양 행동하지만, 문제를 일으킨 학생을 훈육·계도하는 대신 괴물로 낙인찍는다. 오랜 기간 엄석대에게 괴롭힘을 당해온 학생들을 “똑같은 놈들”이라 모욕하는 것 역시 교육적 처사라 보기 어렵다. 동명 영화의 말미에, 이 교사는 권력자에 아부하는 타락한 국회의원으로 등장해 반전 충격을 안긴다.

고작 초6인 엄석대는 두 교사의 나태와 위선 사이에서, 영웅에서 괴물로 추락해 학교에서 추방된다. 하지만 교실에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사건에 책임지는 것은 엄석대가 아닌 교사의 몫이다. 젊은 교사의 호통과 매질은 아이들이 아닌 자신에게 먼저 향했어야 옳다. 현실의 사건에서도 ‘엄석대 찾기’보단 ‘두 교사 찾기’가 본질 파악에 더 유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