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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 칼럼] 석유 시장, 도매가격 공개가 필요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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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김형건 강원대 경제·정보통계학부 교수

김형건 강원대 경제·정보통계학부 교수

언제부턴가 우리 석유 시장에서 정부는 장기적 비전을 모색하기보다 고유가 상황 때마다 여론에 떠밀린 주먹구구식 가격 인하 정책 발굴에만 몰두하고 있다. 알뜰주유소와 전자상거래와 같이 유명한 정책들도 모두 2011년 두바이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나들던 당시 “기름값이 묘하다”는 대통령의 한마디로 시작되었다. 민간 시장에 대한 정부 개입이라는 시장의 강한 반발이 있더라도, 고유가 상황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최근 국제 유가가 올라가자, 산업통상자원부는 어김없이 새로운 가격 경쟁 촉진 정책을 내놓았다. 이번에는 석유제품 도매가격 공개를 확대해 정유사 간 가격 경쟁을 촉진한다고 한다. 정유사의 도매가격을 판매 대상과 지역별로 세분화해 공개하라는 것이다. 기업의 영업비밀을 침해하면서까지 다른 선진국에선 찾아볼 수 없는 제도를 도입할 정도로 우리나라 석유 시장이 비경쟁적인가 싶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2022년 연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석유 가격 중 마진의 비중은 약 7%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인 21%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최하위다. 일본만 하더라도 석유 산업의 마진이 27%에 이른다. 그만큼 우리 시장의 경쟁이 치열하다는 방증이다. 정책의 유효성은 접더라도, 경쟁 촉진을 위한 새로운 가격 규제가 지금 우리 석유 시장에 필요한지 의문이다.

더욱이 동 제도는 공급자 간의 가격 경쟁을 오히려 억제할 가능성이 높다. 석유 시장에서 중요한 도매가격 정보가 모두 공개되면 공급자들은 가격 경쟁보다는 묵시적 협력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서로의 ‘패’를 모두 알고 있는데 굳이 가격 경쟁을 통해 제 살을 깎아 먹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가격은 모두 손해 보지 않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제도는 경쟁 촉진보다는 오히려 정유사 가격의 상향 동조화를 부추길 가능성이 더 크다.

우리나라 석유 시장은 가격경쟁 촉진을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충분히 시도해왔다.

이제 석유업계는 성장을 넘어 미래 세대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할 때다. 탄소 중립을 준비하고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해야 한다. 이제 정부도 우리 석유산업을 새로운 무대로 이끌어줘야 할 시기이다. 이번 정부가 “자유시장 경제 수호”를 경제정책의 기초로 내건 만큼, 원유 정제능력 기준 세계 5위의 우리나라 석유산업이 에너지 전환이라는 큰 파도를 무사히 넘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기를 바란다.

김형건 강원대 경제·정보통계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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