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개발은 기술 변화와 창조적 파괴가 수시로 일어나는 분야입니다. 시대의 변화, 기술 트렌드를 빠르고 정확히 읽어내는 게 중요하지요. ‘열심히, 빨리, 잘’ 하자는 좌우명을 갖고 있어요. 43년 차 반도체 엔지니어로, 단 한 순간도 공부와 도전을 놓아본 적이 없습니다.”
김기남(65)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겸 SAIT(옛 삼성종합기술원) 회장은 현역 시절 뛰어난 기술 역량을 쌓은 비결로 ‘꾸준함’을 꼽았다. 이어 “그 원동력은 기술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다는 신념”이라며 “지금도 누가 찾지 않아도 오전 6시~6시 30분쯤 사무실에 출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공학한림원 집무실에서 올해 7대 회장에 취임한 김 회장을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 공학한림원 회장으로 취임한지 2개월이 지났다.
- “공학기술계 대표 단체 회장으로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공학한림원의 품격 향상’이 임기 중 최우선 과제다. 1300여 회원이 대학·기업·정부기관 등에서 쌓아온 경험과 지혜를 결집해 국가 산업 발전의 엔진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 또 민간의 목소리를 정부에 전달하는 가교 역할을 할 것이다. 중요한 건 사람이다. 시대 변화에 맞게 회원 선발 절차를 개선해 각 분야에서 최고의 업적을 이룬, 보다 젊고 역동적인 전문가를 회원으로 모시고자 한다.”
- 공학한림원의 강점과 사업 구상은.
- “각국에 공학한림원이 있지만, 한국처럼 산업계와 학계가 균형 있게 참여하는 나라는 드물다. 신기술이나 공학 인력 양성 등을 가장 잘 논의하고 공유할 수 있는 조직이다. 최근 ‘반도체’가 화두다. 특히 시스템 반도체 산업 육성에 대한 의견이 많은데, 우리야말로 강력한 인재풀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정책 제안을 할 수 있다.”
- 2025년 창립 30주년이 된다.
- “올해 안에 30주년 준비위원회를 가동할 계획이다. 새로운 30년은 공학한림원이 실천적 싱크탱크로서 정책을 제안하고, 기업의 어려움을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기대한다. 안정적 재정 확보도 필요하다. 이종 산업 간 교류, 산업 애로사항 해소 등 산업계 서비스를 확대하고, 글로벌 기업과 협력해 민간 기반의 재원을 늘릴 계획이다.”
- 코로나19 이후 외국 관련 기관과 교류는 어떤가.
- “세계공학한림원평의회(CAETS) 등에서 꾸준히 활동해왔다. 특히 ‘차세대공학리더’(YEHS) ‘차세대지식재산리더’(YIPL) ‘주니어공학기술교실’ 같은 프로그램은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 1981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43년차 반도체 엔지니어’가 됐다.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 “훌륭한 선배를 만났다. 더욱이 후배 부하 직원들 도움이 없이는 못 한다. 그런 면에서 굉장히 운이 좋았다. 1986년 삼성의 독자 기술로 한국 첫 1메가비트 D램을 개발한 것이 가장 기억이 남는다. 한국의 1메가비트 개발은 1년 반 이상 시작이 늦었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과 이건희 선대회장이 대단한 게, 그 어려운 상황에서 개발팀을 국내와 미국에 두 팀을 두고 경쟁을 시킨 것이다. 결국 한국팀 결과물이 채택됐다. 삼성 반도체인의 신조 1호인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라’를 가슴에 품은 시점이었다. 이런 도전이 없었다면 한국이 짧은 시간에 ‘메모리 기술 독립’을 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을 한 것인데.
- “미국에 연수생으로 갔을 때 현지 엔지니어들이 우리를 ‘코리안 엔지니어’의 준말이라며 ‘캔’이라 부르더라. 비하였다. 날마다 밤샘 근무를 하고, 이튿날 보고서를 공유했더니 인식이 조금씩 달라지더라. 5개월여 뒤엔 팹에서 발생한 문제를 나름의 논리를 세워 설명했는데, 그 논리가 맞았다는 결과가 나오자 ‘캔’이란 말이 쏙 들어갔다.”
- 한국 반도체산업은 메모리 의존도가 크다는 지적이 있다.
- “메모리 분야를 수성하면서 시스템 반도체 역량을 제고해 ‘종합 반도체 강국’으로 나가는 게 한국이 살길이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메모리 비중은 30% 수준이지만, 시스템 반도체는 70%에 달한다. 파운드리→팹리스 순으로 제한된 자원을 전략적으로 잘 활용해 나가야 한다.”
- 반도체 핵심 인재 부족이 리스크로 등장했다.
- “삼성도 반도체 계약학과를 만드는 등 투자를 해왔으나 해결이 쉽지 않다. 정부와 학계, 산업계가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 요컨대 국가는 첨단산업 관련 학과에 대한 지원 및 근무여건 개선 체계를 만들고, 기업은 학계가 양성한 고급 두뇌를 활용해 차세대 연구개발에 집중해야 한다.”
- 미·중 패권 경쟁 속 글로벌 반도체 시장 지형이 급변하고 있다.
- “반도체가 미래 사회의 핵심 전략자산으로 부각되며 국가 간 기술패권 경쟁은 더욱 심화할 것이다. 독자 공급망보다는 우방국 중심의 신 공급망으로 재편될 것으로 전망한다. 한국이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기술혁신밖에 없다. 글로벌 시장이 주목하는 첨단 기술, 우수한 공급 능력 확보가 방법이다.”
☞김기남 회장=1981년 삼성전자 반도체 제조기술팀에 입사해 메모리사업부장, 반도체 총괄 겸 시스템LSI 사업부장, 반도체(DS) 부문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 2022년 회장으로 승진하며, 삼성그룹에서 오너가를 제외하면 8번째로 회장직에 올랐다.
☞한국공학한림원=1995년 설립됐으며, 공학계·산업계 등에서 공학기술 발전에 공적을 세운 우수 공학기술인 1300여 명이 모인 단체다. 기업체 최고기술책임자(CTO)와 대학교수 등이 회원으로, 창조적인 공학기술 개발로 한국 공학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싱크탱크’ 역할을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