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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수호자’ 건축계 노벨상 받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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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사옥. 내부 1~3층엔 ‘통 큰’ 공공 공간이 있고 5층과 11층, 17층에 정원이 있다. 사진은 건물 안 정원에 선 사람들. [사진 The Pritzker Prize]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사옥. 내부 1~3층엔 ‘통 큰’ 공공 공간이 있고 5층과 11층, 17층에 정원이 있다. 사진은 건물 안 정원에 선 사람들. [사진 The Pritzker Prize]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본사 건물을 설계한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70·사진)가 올해 프리츠커(Pritzker Architecture Prize)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은 건축가에게 주어지는 최고 영예로 꼽힌다. 건축을 통해 인류에 공헌했다고 인정되는 건축가에게 주어진다. 치퍼필드는 독일 신(新) 베를린 박물관, 미국 세인트루이스 미술관, 일본 이나가와 묘지 예배당, BBC 스코틀랜드 사옥 등을 설계했다.

데이비드 치퍼필드. [사진 The Pritzker Prize]

데이비드 치퍼필드. [사진 The Pritzker Prize]

심사위원단은 8일 발표문에서 “치퍼필드는 섬세하면서도 강력하고, 절제되고, 우아한 건축을 선보여왔다”며 “건물이 지어지는 장소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고, 시대를 초월한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지어진 건물이 환경과 역사에 미치는 영향까지 치밀하게 계산한다. 건축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시류와 유행을 따르지 않으며 독창적인 작업을 선보여왔다”고 덧붙였다.

치퍼필드의 건축은 무엇보다 정제된 디자인이 특징이다. 심사위원단은 “과장이 넘쳐 나는 시대에 그의 디자인은 군더더기가 없고 세련된 디테일로 완성된다”며 “명상적이라고 할 만큼 차분한 그의 디자인이야말로 물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오래 지속가능한 건물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심사위원장이자 2016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알레한드로 아라베나는 “유행을 따르지 않는 건물이 오래 간다”며 “치퍼필드가 설계한 건물들은 앞으로 오랫동안 시간의 시험을 견뎌낼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글래스고에 자리한 BBC 스코틀랜드 본사 내부 공간. [사진 The Pritzker Prize]

영국 글래스고에 자리한 BBC 스코틀랜드 본사 내부 공간. [사진 The Pritzker Prize]

세계 곳곳에서 다수의 옛 건물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태도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옛 건물을 현대 건축으로 완전히 대체하지 않고 역사와 대화가 가능하도록 적극적으로 시도했다는 것이다.

독일 신(新) 베를린 박물관(2009)이 대표적이다. 19세기 중반에 지어져 2차대전 중 파괴된 건축물을 되살리며 그는 총탄으로 훼손된 벽과 오래된 프레스코화 흔적을 살렸다. 전쟁의 상흔과 현대적인 건축이 나란히 강력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이탈리아 베니스 16세기 관청 건물을 복원한 프로큐라티 베키에(2022)는 지역 장인들과의 협업으로 완성했다. 전통 공예 장인들이 바닥과 벽 마감 작업을 한 이 건물은 “건축과 공예를 결합한 재창조”라는 평가를 받았다.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복원한 독일 베를린 신 미술관 내부. [사진 The Pritzker Prize]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복원한 독일 베를린 신 미술관 내부. [사진 The Pritzker Prize]

치퍼필드는 “건축가로서 나는 어떤 면에서 의미, 기억, 유산의 수호자다. 도시는 역사적 기록이고,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진화한다”며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도시의 특성을 지키면서 진화를 풍요롭게 이뤄내느냐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의 아모레퍼시픽 사옥(2017)도 그의 대표작이다. 심사위원단은 “개인과 집단, 일과 휴식을 조화시킨 건물”이라고 평가했다. 2017년 10월 준공된 이 건물은 내부에 3개의 정원이 있으며, 사무 공간뿐만 아니라 일반인이 이용할 수 있는 로비·미술관·식당 등이 있다.

치퍼필드는 2011년 아모레퍼시픽 사옥 설계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본지와 단독으로 만났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의 달항아리는 더는 응축될 수 없는 본질의 경지를 보여준다”며 “내가 건축에서 추구하는 게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요란하고 스펙터클한 것보다는 차분한 완성도(quiet quality)가 더 중요하다”며 “건물은 50년 후에도 남아야 하고, 50년 후에 더 좋아야 한다. 제한된 비용을 이미지에 쓸 것인가, 아니면 퀄리티에 쓸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건축가는 항상 일반 대중에 대한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도 했다.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는 “아모레퍼시픽 사옥의 표면은 백자 달항아리의 투명한 유약과 흰 백토를 연상케 한다”며 “1층부터 3층까지 공간을 비워 일반인이 이용할 수 있게 실내 광장을 조성한 것은 건물 저층부를 도시에 완전 개방해 공공 공간으로 바꾼 획기적인 시도”라고 말했다.

치퍼필드는 수상 소감에서 “건축의 본질과 의미뿐 아니라 기후변화나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축가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계속 관심을 기울이라는 격려의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1980년 영국 건축협회 건축학교(AA스쿨)를 졸업한 치퍼필드는 리처드 로저스, 노먼 포스터 건축사무소에서 실무 경력을 쌓았다. 1985년 자신의 설계사무소를 세운 뒤 40여년간 건축물 설계와 도시 계획 등 100개 이상의 설계 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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