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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지야, 오빠가 살살할게' 후려치기…이러니 게임 발전 없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혜지’, ‘여왕벌’, ‘보르시'’ 모두 온라인 게임 공간에서 탄생한 멸칭(경멸하여 일컫는 말)이다.

‘혜지’와 ‘여왕벌’은 실력도 없으면서 남의 도움을 받아 레벨을 높이는, 기회주의적인 플레이어를 가리킨다. ‘보르시’는 슈팅 게임 ‘오버워치’의 캐릭터 ‘메르시’를 여성 성기에 빗댄 단어다. 주로 메르시 플레이어를 비하하려는 목적으로 쓰인다.

윤태진 교수가 6일 오후 연세대학교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윤태진 교수가 6일 오후 연세대학교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지난달 28일 출간된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몽스북)에 소개된 내용이다. 이 책은 온라인 게임 속 성차별 연구 보고서다. 여성 플레이어들이 게임 캐릭터를 고를 때 다른 플레이어의 회복을 돕는 ‘비주류 역할’을 고르도록 강요받고, ‘실력 후려치기’를 당하며 성희롱과 성차별에 노출되는 현실을 기록했다.

이 책의 저자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교수를 6일 연세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그는 미네소타 대학에서 미디어 문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주로 게임과 드라마, 웹툰 등에서 드러나는 문화 현상을 연구해왔다. 온라인 게임 공간에서의 젠더 이슈도 그의 관심 분야다.

윤 교수는 “게임 유저들이 쓰는 멸칭 중에는 여성 비하적인 표현이 많다”며 “여성 게이머들은 실력과 상관없이 여러 편견에 부딪친다”고 했다. 대표적인 것이 ‘게구리’ 논란이다.

2016년 ‘게구리’라는 닉네임을 쓰는 플레이어가 오버워치 경기에서 탁월한 성적을 거두자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핵’(부정 프로그램) 사용이 의심된다는 논란이 일었다. 설상가상으로 ‘게구리’가 여고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여고생이 이렇게 잘할 리 없다”는 여론이 불붙듯 번졌다. 지금은 프로게이머가 된 김세연(24)이 당시 방송에 직접 출연해 실력을 입증함으로써 논란은 종결됐지만, 이 사건은 여자 게이머를 향한 편견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 표지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 표지

윤 교수는 “일부 남성 게이머들은 ‘뛰어난 선수를 둘러싼 의혹 제기일 뿐 성별과는 무관한 사안’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온라인을 뒤덮었던 여성 비하적 표현들은 여성 게이머에 대한 전형적인 편견을 보여줬다”며 “출중한 실력을 보이는 여성 게이머는 일단 의심부터 받고, 의혹을 벗은 다음에는 ‘여자치고 잘한다’는 식으로 후려치기 당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했다.

즐기기 위해 하는 게임에서 “혜지야, 오빠가 살살해줄게” 라거나 “혜지치곤 잘 한다”는 말을 들은 여성 플레이어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윤 교수에 따르면 여성 플레이어들은 게임 공간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될 경우 남자인 척하거나, 싸우거나, 게임을 그만두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그는 “그중에서도 관두는 경우가 많지만 아직 게임 회사들은 만족할만한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며 “여성 플레이어를 게임에 붙잡아두기 위해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펴낸 ‘2022 대한민국 게임백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남성 인구 중 게임을 하는 비율은 75.3%, 여성은 73.4%로 거의 차이가 없다. 모바일 게임 이용자의 비율은 오히려 여성이 앞선다.

윤 교수는 게임이 여성 캐릭터를 재현하는 방식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슈팅 게임 ‘서든어택 2’는 2016년 7월 출시 직후부터 여성 캐릭터 선정성 논란에 휘말렸다. 게임 속 여성 캐릭터들이 다리를 벌리거나 가슴을 난간에 걸친 채 죽은 모습이 부자연스럽고 자극적이라는 이유였다. 일부 플레이어들은 죽은 여자 캐릭터에 총기를 난사해 신체가 훼손되는 장면을 찍어 온라인에서 공유하기도 했다.

그는 “과거 영화나 드라마에서 여자 캐릭터가 전형적인 역할에 머무른 것처럼 게임 속 여자 캐릭터도 남성의 시선에서 재현되기 때문”이라며 “다만 게임 산업이 성숙하고 여성 유저가 많아질수록 더 다양하고 현실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이 책을 쓴 이유를 묻자 “이런 문화를 바꿔보자는 것”이라는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그는 “라디오와 TV가 그러했듯이 게임은 머지않아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오락이자 여가 활동이 될 것”이라며 “즐겁자고 하는 게임이 분노와 모욕의 도구가 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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