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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소연의 시인이 사랑한 단어

파울 첼란 ‘그래도 아직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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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소연 시인

김소연 시인

무언가가 이미 소멸했다고 누군가가 비관적인 선언을 했을 때 그렇게 단언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나는 좋아한다. 무언가가 아직 잔존하고 있다는 걸 입증하려는 태도를 나는 좋아한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에서 배웠다. 대도시의 사람들은 반딧불이가 더이상 출몰하지 않아 멸종되었다고 믿을 법도 하지만, 그 미광이 어딘가에서 유영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삭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런 점에서 시는 반딧불이 같다. 시는 잘 본다. 이 사회가 시에게 부여한 역할이다. 잘 보이는 걸 잘 보는 것이 아니라 잘 안 보이는 걸 잘 보는 존재이다. 선연히 보여주기 위해서 시는 그 자리에 오래 머문다.

시인이 사랑한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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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시인의 시선은 방향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다. 두리번거리다 방황할 수밖에 없다. 길가에 쪼그려 앉아 하염없이 무언가를 응시할 수밖에 없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모양새가 될 수밖에 없다. 실은 아무것도 기다리지는 않으면서도 말이다. 바라보아야 할 것에 집중하는 순간에는 기다림이라는 것이 틈입할 여지조차 없는 것이다. 다만, 기다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뿐이다.

기다림 대신에 시는 붙들림으로 완성된다. 희망적인 무언가를 고대하는 마음 없이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다. 시는 그저 곁에 있는다. 인간의 말이 불가능해질 지경의 대화를 침묵 속에서 잇는다.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든 멀든, 시는 가깝게 느낀다. 바라보고 있는 그것이 누락되지 않아야 하기에. 누락될지라도 같이 누락됨을 자처하기에.

2차대전 당시 독일 집단학살 수용소의 생존자였던 파울 첼란은 게오르크 뷔히너 문학상 수상 연설문 ‘자오선’에서 “그래도-아직은”이라는 말로 시의 입장을 설명했다. 이 말에는 ‘이미 아니다’라는 다수의 판단을 유예함과 동시에 잔존하고 있는 미미한 존재를 가리키는 고집이 서려 있다. “오히려 시는 우리의 모든 자료를 기억하며 머무르고 있는 집중입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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