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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승현의 시선

매듭을 푸는 알렉산더를 상상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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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사회부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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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이 5년 만에 대통령실에 소환됐다. 그간 정부 실력자들이 심심찮게 사용했겠지만, 이번처럼 세계가 주목하는 이슈에 등장한 건 오랜만이다.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지난 5일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 해결 절차를 암시하며 그 비유가 나왔다. 그는 “양측 정상이 만나서 소위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푼 직후에 챙겨야 할 현안들을 속도감 있게 다뤄나가는 절차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확히 5년 전인 2018년 3월,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북한의 비핵화 문제를 ‘일괄적·포괄적’으로 타결하겠다는 취지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겠다”고 했다. 그 고위 관계자가 김의겸 당시 청와대 대변인(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다. 김 대변인은 1년쯤 뒤 기자들과의 대화에서도 “나에게 (고르디우스 매듭 발언의) 저작권이 있다”는 말까지 했다. 북한 노동신문이 ‘지도자의 결단’을 언급하며 그 표현을 쓴 것에 대한 유쾌한 농담이었다.

5년 만에 만난 ‘고르디우스 매듭’
“끊겠다”던 문재인 정부는 실패
자르는 용기, 푸는 지혜 다 필요

남북, 북·미 정상회담이 한반도에 평화의 희망을 주던 시절, 대북 정책에 대한 정부의 자신감이 그렇게 표출됐다. 국민의 절반 정도는 수십년간 얽히고설킨 갈등과 허언의 매듭이 단칼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기대를 했다. 그러나, 지난 5년의 역사는 한반도의 리더십이 마케도니아의 영웅을 넘어서지는 못했음을 보여준다. 남북 관계는 더 풀기 어려운 매듭으로 변태했다.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도 5년 전의 매듭에 버금갈 정도로 꼬이고 꼬인 비운의 역사다. 김성한 실장의 ‘고르디우스 비유’ 이후 정부의 공식 발표가 이어졌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지난 6일 “2018년 대법원으로부터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국내 재단이 대신 판결금을 지급한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미래 지향적 한·일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결단”이라고 했고, 기시다 일본 총리는 한국 정부의 발표에 대해 “한·일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기 위한 것”이라며 “역사 인식에 관해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할 것”이라는 입장을 냈다. 매듭을 다루는 첫발을 뗀 것이다.

이번 고르디우스 비유가 5년 전과 미묘하게 다른 점이 있다. 매듭을 “끊겠다”가 아니라 “푼다”라고 표현한 부분이다. 과거의 남북문제를 다룰 때처럼 단칼에 자르지는 않겠다는 신중한 시각이 개입된 디테일인지는 불분명하다. 한일·한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외교의 시간’에 그 실체가 드러나겠지만, 지켜보는 국민은 조마조마하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피 끓는 분노가 짠하고, 야당의 거센 반발에 한숨이 나온다. 반세기 넘게 이어진 복잡한 역사적 사실에 주관을 갖기가 쉽지 않다. “매듭을 푼다”는 말 자체가 애당초 성립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자르지 않고서는 풀리지 않는데, 잘라서는 안 되는 매듭이라면…. 고대의 알렉산더에게 이 문제의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했을까. 앞으로의 외교와 내치는 그 답을 찾는 여정이다.

5년 전 칼럼에서 고르디우스의 매듭 신화를 다룬 적이 있다. 신화에도 자르는 것과 푸는 것에 중의적인 의미가 있었다. 고르디우스는 기원전 8세기 지금의 그리스 북쪽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옆 나라(프리기아)의 왕이었다. 자신을 왕좌에 앉혀준 소달구지를 신에게 바치면서 왕은 복잡한 매듭으로 신전 기둥과 바퀴를 묶었다고 한다. 이어 “매듭을 푸는 사람이 아시아의 왕이 될 것이다”고 예언했다.

400여 년이 지나 마케도니아의 영웅 알렉산더 대왕이 그곳을 지나다 매듭 앞에 섰다. 그는 잘 풀리지 않는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렸고 이후 아시아를 제패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는다는 말은 신에게 도전하는 수준의, 시도하기 힘든 과감한 결단을 추앙하는 말이었다. 반대로 이런 경고가 함께 전해져 온다. 예언을 거슬러 매듭을 잘라서 결국 제국이 분열했다는 것이다. 이 결말은 이전 정부에게 어느 정도 부합한다.

집권 2년 차 윤석열 정부는 앞에 놓인 매듭을 어떻게 처리할까. 매듭을 ‘푼다’고 참모는 설명했지만, “지지율 1%가 나오더라도 국익을 위해 할 일은 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의지엔 칼을 든 알렉산더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복잡한 매듭을 잘라낸 것처럼 시원하게 푸는 게 모든 정부의 바람이겠지만, 그게 쉬웠으면 고르디우스의 매듭이었겠는가. 자를 용기, 푸는 지혜가 모두 필요하다. 북핵이나 강제징용만큼은 아니더라도 40년 묵은 설악산 케이블카, 10년 된 제주 2공항 문제 등 크고 작은 고르디우스 매듭이 도처에 깔렸다. 자를 것이냐, 풀 것이냐. 용산의 능력을 보여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