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혜리 논설위원
#지난해 10월. 네이버의 AI 전문가(개발자)와 오랜만에 만나 점심을 먹던 중 깜짝 놀랐다. 그가 휴대전화를 열어 '악당'이라는 키워드를 담은 한국어 한 문장을 적어 넣었는데 불과 10여 초 만에 1500자 분량의 칼럼 하나가 뚝딱 나왔기 때문이다. 지난 2021년 설립된 국내 신생 스타트업 뤼튼 테크놀로지가 네이버의 한글 기반 초거대 인공지능(AI) 하이퍼클로바를 탑재해 그때 막 세상에 내놓은 텍스트 생성 AI 서비스 '뤼튼(wrtn)'을 대면한 순간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경험한 생성 AI의 위력에 그야말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충격은 잠시. 인간 솜씨를 빼닮은 매끈한 문장력에도 불구하고 최신 지식의 부재에다 얕은 깊이 등 한계 역시 명확해 안도하며 뤼튼을 잠시 잊고 살았다.
![뤼튼이 지난 2021년부터 매주 진행해오고 있는 생성 AI 세미나 모습. 모든 팀원이 금요일에 모여 간식을 먹으며 해외 AI 기술과 비즈니스 인사이트를 공유한다. [사진 뤼튼]](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303/08/0dc9840a-673d-4d49-ba52-b4a2f5c9836b.jpg)
뤼튼이 지난 2021년부터 매주 진행해오고 있는 생성 AI 세미나 모습. 모든 팀원이 금요일에 모여 간식을 먹으며 해외 AI 기술과 비즈니스 인사이트를 공유한다. [사진 뤼튼]
#그로부터 두 달 뒤인 2022년 12월. 미국 인공지능 회사 오픈 AI가 자사의 초거대 AI인 GPT-3.5를 탑재한 '챗(Chat) GPT'를 세상에 내놨다. 출시 두 달 만에 전 세계에서 사용자가 1억 명을 넘어설 만큼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국내서도 마찬가지였다. IT업계 종사자나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층뿐 아니라 50~60대 중·노년층까지 챗GPT 놀이에 푹 빠졌다. '프롬프트 지니'처럼 한국어 질문을 곧바로 영어로 바꿔주는 무료 확장 기능을 챗GPT 안에 굳이 설치하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한국어로 질문하고 답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컸다. 물론 한국어가 주력 언어가 아니다 보니 영어로 물을 때보다 훨씬 느리고 덜 만족스러운 답변이 나오기는 하지만 한국의 일반 사용자를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다윗과 골리앗 모두 이기는 챗GPT 세상
이쯤에서 자연스레 뤼튼 생각이 다시 났다. 올 초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 CES 2023에서 혁신상을 받은 데서도 알 수 있듯 뤼튼은 서비스 업그레이드를 지속해왔다. 하지만 미국의 비슷한 스타트업들이 1000억원대의 막대한 투자를 받을 때 45억원을 투자받아 이제 막 매출을 올리기 시작한 직원 27 명의 작디작은 스타트업이 어떻게 챗GPT보다 앞서 이토록 빠르게 서비스를 내놓을 수 있었는지 그 배경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GPT-3를 탑재해 지난해 이미 수조원대 기업가치(15억 달러)를 지닌 유니콘 기업에 등극한 미국의 텍스트 기반 생성 AI 스타트업 재스퍼(Jasper) 등 쟁쟁한 경쟁자에 맞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GPT-3.5의 응용프로그램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API) 사용료가 최근 2년 새 30분의 1 수준으로 드라마틱하게 떨어지면서 이를 응용하는 스타트업의 경쟁은 훨씬 치열해졌고 앞으로 더 거세질 게 분명한 상황이니 말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두 번째 궁금증부터 먼저 풀어보자면, 최근 만난 뤼튼 이세영(27) 대표는 자신만만했다. 뭘 모르는 20대의 치기가 아니라 숫자에서 나온 자신감이었다. 실제로 챗GPT 출시 이후 뤼튼은 오히려 사용자가 가파르게 늘어 현재 12만에 달한다. 생성 단어 수는 20억개를 넘어섰다. 다음 달엔 일본에서 일본어 서비스까지 출시한다. 비영어권에선 챗GPT 등보다 더 경쟁력이 있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정이다.
![뤼튼 이세영 대표[사진 뤼튼]](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303/08/2168dc45-afa7-4a1d-a5eb-fcca226984a7.jpg)
뤼튼 이세영 대표[사진 뤼튼]
이 대표는 "기술적 해자(장벽)가 거의 없어진 데다 마치 과거 문자 메시지처럼 비용도 곧 0에 수렴할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재스퍼의 셰인 올릭(Shane Orlick) 대표가 최근 한 콘퍼런스에서 "다윗과 골리앗 싸움에서도 승자가 한 명이 아니며 모두가 승자일 수 있다"고 말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인터넷·모바일 혁명 때처럼 기술 우위로 발 빠르게 시장을 먼저 점유한 승자가 모든 걸 독식하던 때와 달리 생성 AI 세상에선 사용자가 쓰기 편하도록 특화된 서비스를 내놓는 누구나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이라면 뤼튼이 하듯이 영어 기반의 챗GPT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한국어 실력(하이퍼클로바)으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가령 광고 카피든 엘리베이터 피치용 문구든 긴 블로그 글이든 영어 기반 서비스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는 쓰기 편한 템플릿을 사용자에게 빠르고 값싸게 제공하면 한국에선 누구도 범접 못 할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주목받는 문과적 언어 소통 능력
그런 서비스는 물론 하이퍼클로바 같은 한국어 기반 초거대 AI가 있어야 가능하지만 단순히 이걸 활용한다고 내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프롬프트(명령어)를 어떤 식으로 결합해서 서비스(템플릿) 안에 제대로 구현하느냐가 핵심인데, 이 지점에서 굳이 구분하자면 이과적 기술 역량을 넘는 문과적 언어적 소통 능력이 중요하다.
하정우 네이버 AI랩 소장은 최근 생성 AI 관련 강연에서 "프롬프트라는 건 과거 개발자가 했듯 어려운 컴퓨터 언어(코딩)를 쓰는 게 아니라 결국 자연어를 구사하는 것이기에 답변을 잘 끌어낼 수 있는 언어적 능력이 더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뤼튼이 국내에서 하이퍼클로바를 활용한 첫 텍스트 기반 생성 AI 스타트업이 될 수 있었던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대표는 다른 많은 IT 관련 스타트업 CEO들과 달리 개발자 출신은 아니다. 학부 시절 텍스트 마이닝을 공무하긴 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하고 고등학교 때 사회과학 서적에 탐닉하던 문과 출신이다. 게다가 대학 때까지 청소년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글쓰기 교육을 진행해오면서 인간의 창의력을 확장해주는 글쓰기에 대한 이해가 쌓였기에 남들보다 먼저 이런 서비스를 내놓을 수 있었다.
![뤼튼 이세영 대표가 고교 시절 '도전 골든벨' 최후의 1인에 올라 받은 상금 300만원으로 지난 2014년 처음 개최한 한국청소년학술대회는 3년만에 참가 인원이 30명에서 아시아 13개국 3만명으로 늘었다. 사진은 2018년 제10회 사진. 이때 경험이 창업의 계기가 됐다. [사진 뤼튼]](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303/08/47c6b217-8704-4635-9c4f-9886341ef55b.jpg)
뤼튼 이세영 대표가 고교 시절 '도전 골든벨' 최후의 1인에 올라 받은 상금 300만원으로 지난 2014년 처음 개최한 한국청소년학술대회는 3년만에 참가 인원이 30명에서 아시아 13개국 3만명으로 늘었다. 사진은 2018년 제10회 사진. 이때 경험이 창업의 계기가 됐다. [사진 뤼튼]
요즘 뜨는 프롬프트 엔지니어라는 직종 역시 '엔지니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개발(코딩) 능력과는 거리가 먼 기획자나 마케터 등 인간 언어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생성 AI가 인간 특유의 창의성을 침범하기보다 오히려 창의성을 확장한다. 어쩌면 우리는 생성 AI라는 초 혁신적 기술 덕분에 역설적으로 인문학적 강점을 가진 사람들이 더 이상 '문송'(문과라서 죄송)하지 않는 시대를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