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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딴지 걸면 美도 손 못썼다…수차례 막혔던 韓 외교 현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엄중한 국제 정세에서 한·일 협력이 대단히 중요하다"
(박진 외교부 장관, 6일 강제징용 해법 발표 기자회견)

박진 외교부 장관이 6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청사 브리핑룸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이 조성한 재원으로 2018년 대법원 확정 판결의 판결금을 대신 변제하는 해법을 발표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박진 외교부 장관이 6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청사 브리핑룸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이 조성한 재원으로 2018년 대법원 확정 판결의 판결금을 대신 변제하는 해법을 발표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정부가 6일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3자 변제' 결단을 내리며 반복해서 강조한 이유 중 하나는 '국제 정세 하에서 한·일 협력의 필요성'이었다. 실제 전·현직 외교안보 당국자들은 "한·일 양국 관계, 한·미·일 3각 협력은 물론이고 다자 무대에서도 일본과 이해 관계가 유독 일치하거나 협력이 절실한 순간이 많다"며 "한·일 관계가 삐걱대면 곤란한 경우가 적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일본의 호응과 협력이 없으면 자칫 쉬운 길도 돌아갈 수 있다"는 지적은 과거 한국 외교가 수차례 마주했던 현실이다.

장면① 트럼프에 "韓 말 듣지 말라"던 아베

2020년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에 따르면, 2018년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종전선언을 검토했지만 고(故)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일본 총리가 백악관을 찾아가 '북한에게 양보하지 말라'고 직접 설득했다. 종전선언은 문재인 정부의 숙원 사업이었지만 일본은 아베 내각에 이어 기시다 내각 들어서도 "시기상조"라며 꾸준히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

종전선언은 논란만 낳은 채 무산됐지만, 일본의 강경한 입장이 남긴 교훈은 있다. 미국의 대북 정책 결정 과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일본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고 '패싱(passing)'한다면 한국 주도의 대북 정책도 힘을 받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 들어 미·일 동맹이 안보 측면에서 더욱 견고해지면서 북핵 문제 관련 일본의 지분은 더욱 늘어났다.

2018년 6월 미국 워싱턴 백악관 집무실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 고(故)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일본 총리가 악수를 나누는 모습. AFP=연합뉴스

2018년 6월 미국 워싱턴 백악관 집무실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 고(故)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일본 총리가 악수를 나누는 모습. AFP=연합뉴스

역으로 일본 정부가 방위비 증강 등 대외 정책을 추진하는 데에서도 역시 한국 정부의 동조가 필요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일본이 반격 능력을 보유할 수 있도록 안보 문서를 개정하자, 한국 정부는 "일본이 한반도를 대상으로 반격 능력을 행사할 경우, 사전에 한국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타국의 허가가 필요한 사안이 아니다"라는 일본 정부의 '선 긋기'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며 "안보와 국익에 직결하는 문제는 우리 동의가 필요하다"고 못 박았다.

장면② 미국만 홀로 섰던 한·미·일 기자회견

한·일 갈등이 전면에 불거져 한·미·일 3각 협력의 약한 고리가 그대로 드러나 버린 순간도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1년 11월 한·미·일 외교차관 협의 후 기자회견에 당초 공지와 달리 미 국무부 부장관만 홀로 언론 앞에 나타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일본 측은 한국 경찰청장의 독도 방문을 문제 삼아 회견 불참을 통보했다.

웬디 셔먼 미 국무부 부장관은 당시 홀로 카메라 앞에 앉아 "꽤 오랜 기간 계속됐던 한·일 이견 중 하나로 오늘 회견의 형식이 바뀌고 말았다"고 말했다. 명백한 한국 영토인 독도 방문을 문제 삼아 기자회견에 불참한 일본이 먼저 외교적 결례를 범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한·미·일 3국이 얽힌 여러 현안에서 일본이 '딴지'를 놓을 경우 미국조차도 별다른 방도가 없다는 현실도 여실히 보여줬다는 분석이다.

2021년 11월 미 국무부에서 웬디 셔먼 미 국무부 부장관 한미일 차관협의회가 끝난 후 홀로 기자회견에 나타난 모습. 워싱턴특파원단. 연합뉴스.

2021년 11월 미 국무부에서 웬디 셔먼 미 국무부 부장관 한미일 차관협의회가 끝난 후 홀로 기자회견에 나타난 모습. 워싱턴특파원단. 연합뉴스.

전·현직 외교관 "日 협력 필수"

외교 일선의 공무원들은 한·일 관계가 악화해 국제무대에서 시너지 효과가 반감되면, 외교력도 그만큼 타격을 입게 된다는 데 동의한다. 유엔 등 다자 외교 무대에서 한·일은 핵심 정보를 나누며 상부상조하는 경우가 많은데,양국 관계가 안 좋을 때는 공유하는 정보와 협력의 '밀도'와 '빈도' 자체가 달라진다는 지적이다.

한 외교부 당국자는 "공관에 나가면 한국 외교관은 지리적, 경제적으로 공통점이 많은 일본 외교관과 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곤 한다"며 "양국 관계가 근본적으로 악화하면 그런 관계에도 타격을 주고, 결정적 순간에 일본의 도움을 받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당국자는 "한·일은 다자 무대에서 민주주의·인권·군축 등 다양한 현안에 대해 대체로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 유사 입장국(like-minded countries)일 때가 특히 많다"며 "지난 몇 년간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를 걸은 탓에 일본 외무성에서 한국 입장을 그나마 잘 이해하던 '코리안 스쿨'이 위축돼 공통분모가 줄어든 건 아쉬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일본은 우리 외교의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 인권 존중 등 기본 가치를 공유하는 이웃 국가로 인도·태평양 지역 내 자유주의 국제질서 유지에 공통의 이익을 가지고 있다"며 "양국은 아시아에서 미군이 상시 주둔하는 유일한 2개국이라는 점에서 역내 안보 유지에도 긴밀한 상호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른바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아시아 회원국으로는 양국밖에 없다는 점에서 다양한 지역과 글로벌 이슈에서 협력을 통해 윈윈(win-win)할 여지가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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