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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시각각

비경제부처 공정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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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현장 기자로 있으면서 공정거래위원회를 꽤 오래 지켜본 편이다. 공정위는 정책도 하고 조사도 한다. 경쟁 정책을 담당하는 총리 소속의 중앙행정기관으로 경제부처 회의에 참석한다. 담합이나 불공정행위를 조사해 제재하는 합의제 준사법기관이기도 하다. 후자의 조사·제재 기능 때문에 ‘경제검찰’ 소리를 듣는다.

한데 정작 공정위는 ‘경제검찰’ 타이틀을 부담스러워하곤 했다. 자신들은 사정당국이나 규제부처가 아니라는 거였다. 물론 ‘경제검찰’이라는 세평을 은근히 즐길 때도 없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 공정위는 물가당국이나 동반성장당국으로 맹활약했고, 경제검찰의 위력을 대놓고 과시했다. 그래도 공정위 스스로는 ‘경제검찰’ 대신 ‘시장경제의 파수꾼’이란 표현을 즐겨 썼다. 경제부처와 준사법기관 사이에서 애써 균형을 잡으려는 안간힘이었다.

준비 없이 시작한 은행·통신 조사
소송 완패한 ‘소주 담합’ 조사 상기
경제 창의·활력 살리는 게 경쟁법

공정위의 이런 태생적 고민을 윤석열 대통령이 깔끔하게 정리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1월 말 공정위 업무보고에서 “공정위는 경제부처가 아니고 경제사법기관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부처가 아니라는 판단에 놀랐고, 경제사법기관, 즉 ‘경제검찰’이 되라는 주문에 두 번 놀랐다. 공정위는 이례적으로 법무부·법제처와 함께 업무보고를 했다.

공정위는 태생 자체가 경제부처였다. 1981년 경제기획원 소속으로 출범했다가 94년 총리 소속의 중앙행정기관으로 독립했고, 96년 지금과 같은 장관급 기관이 됐다. 정부가 공정위의 경제검찰 기능을 활용하는 것까지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과거 정부들도 공정위 관료를 청와대 경제수석실뿐 아니라 민정수석실에 파견했다.

공정위 업무보고 날, 법무부는 올해 하반기 대검에 공정거래사건 전담부서 신설을 추진하겠다고 보고했다. 법무부 반독점국과 연방거래위원회(FTC)가 함께 경쟁정책을 집행하는 미국 모델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가구업체 입찰 담합 등 최근 검찰이 공정거래 사건을 독자적으로 수사하는 것도 비슷한 흐름이다. 공정거래 관련 사건은 공정위가 먼저 나서고 필요하면 검찰에 고발하는 전속고발권이 사실상 무력해졌다.

공정위 잘못도 있다. 기업 눈치를 보느라 전속고발권 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전속고발제 위에서 공정위가 잠자니 견제가 들어왔다. 1996년 검찰총장이, 2014년에는 감사원장·중소벤처기업부 장관·조달청장도 검찰 고발을 요청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고 법무부와 FTC로 이원화된 미국 모델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관할권 혼선, 비용 중복, 일관성 없는 업무 처리 등의 문제가 우려된다. 미국 이후 경쟁법 집행기구를 설치한 모든 나라가 단일 기구를 선택했다(지철호, 『독점규제의 역사』).

‘비경제부처’ 공정위가 발 빠르게 은행과 통신사 현장조사에 나섰다. 이에 앞서 민주노총 건설노조를 제재했고 화물연대 파업 때도 나섰다. 공정위가 노조 일에 개입한 데엔 논란이 있다. 1890년 세계 최초의 독점규제법인 미국 셔먼법은 노조의 집단행동에 적용됐지만 이를 보완하기 위해 1914년 클레이튼법을 만들어 노조를 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했다. 노조 행태가 고약하다고 경쟁법이 나설 일은 아니라는 거다.

은행의 담합이나 통신사의 불공정행위 조사도 충분한 사전 준비 없이 뛰어든 것 같다. 은행과 통신은 정부 개입이 일상적인 동네다. 2010년 소주 담합 사건이 떠오른다. 국세청의 행정지도가 있었다고 소주업체는 항변했지만 공정위는 인정하지 않았다. 처음엔 2000억원 넘게 과징금을 통보했다가 272억원으로 깎아줬다. 이마저도 2년 뒤 대법원에서 뒤집혀 공정위가 완패했다. 소주회사를 조사하고 제재했던 고위 관료들은 이미 퇴직한 뒤였다. 공정거래법 1조를 다시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경제의 창의와 활력을 되살리자는 게 경쟁법의 목적이다. 경제검찰 역할이 기업의 군기 잡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