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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종주의 시선

니콜스 사건과 한국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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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임종주
임종주 기자 중앙일보
임종주 정치에디터

임종주 정치에디터

흑인 민권운동의 성지 멤피스에 생채기를 낸 ‘타이어 니콜스’ 사건은 구조적 관점의 중요성을 환기한다. 지난 1월 7일 밤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29살 흑인 타이어 니콜스가 경찰의 집단폭행으로 숨졌다. 교통단속 과정에서 최루가스와 테이저건, 주먹, 발길질, 곤봉 구타가 난무했다.

4살 아들을 둔 니콜스는 퇴근 후 어머니 집에 가던 길이었다. 희귀질환 크론병으로 190㎝ 장신에도 몸무게는 60㎏ 남짓밖에 안 됐다. 집과 2분 거리에서 “엄마, 엄마”를 외치며 울부짖던 고통의 몸부림이 경찰 보디캠에 그대로 담겼다. 마틴 루서 킹 암살이라는 멤피스의 비극이 55년 만에 되풀이되면서 규탄 시위가 미국 전역으로 번졌다.

2023년 2월 3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열린 흑인 '타이어 니콜스' 사망 항의 시위에서 참가 여성이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는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2023년 2월 3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열린 흑인 '타이어 니콜스' 사망 항의 시위에서 참가 여성이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는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사건은 2020년 5월 백인 경찰 무릎에 목 눌려 숨진 ‘조지 플로이드’ 사건과 흡사하다. 당시 응축된 분노가 ‘BLM’(Black Lives Matter, 흑인 목숨도 소중) 운동으로 표출돼 그해 미국 대선판을 뒤흔들었다. 그런데 이번 가해 경찰들은 백인이 아니라 모두 흑인이었다. 보디캠 영상이 공개되기도 전에 5명이 체포돼 2급 살인혐의로 기소됐다. 이례적으로 신속한 조치였다. 그럼에도 “백인 경찰이었어도 그랬을까”라는 의문이 뒤따랐다. 피해자 또한 흑인이 아니었다면 인간 피냐타(pinata, 눈을 가리고 막대기로 선물통 깨뜨리는 놀이)가 됐겠느냐는 반문도 컸다.

실제 백인 경찰이 연루된 사건은 변명과 회피, 뭉개기가 다반사였다. 플로이드 사건은 의료사고였다는 경찰 해명이 현장 영상으로 뒤집히면서 더 큰 반발을 불렀다. 같은 해 경찰 오인 사격에 희생된 흑인 여성 ‘브레오나 테일러’ 사건은 반년이나 묻혀 있다가 경찰의 정당방위로 결론 났다. 대선 목전에서 경합지 펜실베이니아를 뒤흔든 ‘월터 월리스’ 사망 사건은 1년을 끈 끝에 시 당국의 보상으로 종결됐다.

2020년 6월 3일(현지시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망으로 미국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 차별 철폐 요구 시위가 백악관 앞까지 번졌다. 백악관 앞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는 가운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2020년 6월 3일(현지시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망으로 미국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 차별 철폐 요구 시위가 백악관 앞까지 번졌다. 백악관 앞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는 가운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비판적 인종이론은 ‘흑인 대 흑인’ 사건에 깔린 구조적 인종주의를 간파한다. 미국 제도가 백인과 비백인 간 불평등을 초래하기에 이를 본질적으로 인종차별적이라고 본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100일 의회 연설(2021년 4월)에서 “미국을 괴롭히는 제도적 인종차별을 뿌리 뽑자”고 역설한 것도 그 연장선이다. 보수 우익의 반격은 결사적이다. 공화당이 장악한 플로리다 등 17개 주는 인종교육을 아예 금지했다. 백인에게 죄의식을 강요해 국가를 분열시킨다는 게 이유다. 화이트 제노사이드(백인 학살)라는 자극적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니콜스 사건에서 구조를 바라보는 관점을 잃게 되면 미래지향적 실체 규명과 해결 여지는 소실된다. 개인적 일탈로 한정되고 비난과 처벌도 그에 맞춰진다. 사건의 배경이나 맥락, 관행 조건은 배제된다. 가해자의 책임을 묻는 선에서 사건은 멈춘다. 미국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영이 지적한 ‘구조적 부정의(不正義)’는 개선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고 지속해서 재생산된다. 최악의 시나리오다.

이번 사건으로 다시 불거진 미국 사회의 구조적 부정의는 우리 정치 상황과 묘하게 오버랩 된다. 양쪽이 극단으로 갈려 정서적 내전 상태로 돌진한다. 진영 논리와 팬덤에 빠져 정치 불신은 임계점으로 치닫는다. 국회의원 300명 시대를 연 19대 총선 이후 거대 양당이 차지한 의석 비율은 93%(19대), 81.7%(20대), 94.3%(21대)에 달한다. 독과점 구조는 고착화하고 패거리 정치가 만연한다. 어렵사리 원내에 진출해도 양당 틈바구니에서 숨쉬기조차 어렵다. 청년 정치 활성화 수준은 세계 꼴찌를 맴돈다. 시쳇말로 꼰대 정치인 그들만의 리그다. 청년이 게으른 탓인가. 양당 밖 정치인은 죄다 무능해서인가. 복합적 난제다.

조해진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정치관계법개선소위원장이 지난달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03회 국회(임시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제7차 정치관계법개선소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다. 뉴스1

조해진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정치관계법개선소위원장이 지난달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03회 국회(임시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제7차 정치관계법개선소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다. 뉴스1

총선을 눈앞에 둔 정치권은 연초부터 개혁을 외쳤다. 그런데 바로미터인 선거제 개편은 선거구 획정 법정 시한(4월 10일)이 다 되도록 난항이다. 그사이 의원을 350명으로 50명 늘리자는 안이 불쑥 나왔다. 의원 숫자가 적어서 문제라는 것인가. 현행 소선거구제 유지를 전제로 한 비례제 조합에, 도농복합형이라는 난해한 방정식도 유력 안으로 얹혀졌다.

흑백 불평등 확인한 니콜스 사건
여야 독과점 구조 굳어진 여의도
소선거구제 개편·기득권 탓 난항

가뜩이나 이해관계가 난마 같다는데 이래서 될 일인가. 비례성·대표성 강화라는 그럴듯한 명분 뒤에 기득권의 그림자가 서성이고 구조적 관점을 외면한 변죽 울리기가 귓전에 아른거린다. 국회가 곧 난상토론에 들어간다고 하지만, 이해당사자에게 개혁의 칼을 쥐게 하는 게 가당한지 근본적 의문이 든다.

니콜스 사건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잊힐 조짐을 보인다. 정치개혁은 회의감이 팽배해진다. ‘그럼 그렇지’ 하는 체념과 불안감이 엄습한다. 결코 현실이 돼서는 안 될 국가적 불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