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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한·일 돌파구…바이든 “동맹 획기적 새 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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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정부가 6일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피고 기업을 대신해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지원재단)이 조성한 기금으로 판결금과 지연이자를 지급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2018년 한국 대법원에서 배상 책임이 인정된 일본 피고 기업(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의 기금 참여는 이번엔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한국의 전경련과 일본의 게이단렌(經團連) 등 양국 경제계가 공동 조성하는 ‘미래청년기금’(가칭)에 참여하는 등의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左), 기시다 일본 총리(右)

윤석열 대통령(左), 기시다 일본 총리(右)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상은 정부 발표 직후 ‘식민지배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담은 1998년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등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전범 기업이 1엔이라도 내야 한다’는 일부 피해자의 반발과 국내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날 지난 4년간 한·일 관계 경색의 원인이 된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을 내놓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한덕수 국무총리와의 주례회동에서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결단”이라고 말했다고 이도운 대변인이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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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은 최근 참모들에게 “어차피 할 것 아니냐. 그러면 미리 매를 맞는 게 낫지, 내년 총선을 앞두고 할 것인가”라며 협상에 속도를 낼 것을 주문했다고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전했다. 이 관계자는 “(이번 해법 발표에는) 윤 대통령의 결단이 있었다”고 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지금 엄중한 국제 정세와 글로벌 경제·안보 복합 위기에서 한·일 협력은 대단히 중요하다”며 “대한민국의 높아진 국력과 국위에 걸맞은 주도적이고 대승적인 결단”이라고 밝혔다. 박 장관은 일본 피고 기업의 참여가 없는 ‘반쪽 합의’라는 지적엔 “일본 측이 일본 정부의 포괄적인 사죄와 일본 기업의 자발적인 기여로 호응해 오기를 기대한다”며 “비유하자면 물컵이 절반 이상은 찼는데, 앞으로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에 따라 물컵이 더 채워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일본 피고 기업의 국내 자산 매각 조치(현금화)가 목전이고 일본의 입장이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미·일 협력이 절실해진 국제 정세까지 겹쳤다”며 “이런 삼중고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결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도 “현재 한국 외교·안보 지형의 큰 그림을 보고 정부가 전략적 판단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적 부담 감수한 윤의 결단…“일본이 남은 절반 채워야”

‘전략적 판단’의 의미는 이날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의 발언에서 드러난다. 그는 “북한의 핵 위협이 고도화되고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한·일 관계의 회복과 한·미·일 협력 강화는 한국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말했다. 안보·경제 복합 위기 속에서 정부의 시선이 일본만이 아닌 그 뒤의 미국을 바라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연유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안보 위기는 두말할 나위 없이 전례 없는 수준의 북한 핵·미사일 위협이다. 한·미는 오는 13일부터 23일까지 역대 최장 기간의 연합훈련인 ‘자유의 방패(Freedom Shield)’를 진행한다. 미군은 6일 B-52H 장거리 폭격기를 한반도에 전개하는 등 일주일이 멀다 하고 북핵 억제를 위해 전략자산을 투입하고 있다.

경제위기는 고물가, 수출 부진, 내수 침체 등이 한꺼번에 닥친 2023년 한국의 경제 상황을 의미한다. 이 같은 경제위기는 현실적으로 미국의 지원 없이는 극복이 어렵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한·미 통화 스와프 체결과 자유무역협정(FTA) 발효와 같은 미국발 돌파구가 절실한 시점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절치부심 중인 여권으로선 경기 회복은 총선 승리를 위한 필수 조건이기도 하다.

이런 복합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는 자칫 ‘친일 프레임’에 걸릴 수 있다는 우려에도 한·일 관계 개선을 통한 한·미·일 협력 강화라는 미국의 ‘숙원’을 풀기로 결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정부 발표 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환영 입장을 냈다. 바이든 대통령은 6일(현지시간) 별도의 성명을 내고 “오늘 한국과 일본의 발표는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 간 협력과 파트너십에 획기적인 새 장(a groundbreaking new chapter)을 열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더 안전하고, 더 안심할 수 있으며, 더 번영하는 양국 국민의 미래를 만들기 위한 중차대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고도 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날 “(한·일이) 화해한다면 중국과 북한에 대응하기 위해 동맹국 간 협력을 증진하려는 미국의 노력을 신장할 것”이라고 전했다.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은 해법 발표 당일 워싱턴DC에 있었다. 정부의 시선이 미국에 가 있다는 또 다른 방증이다. 김 실장은 지난 5일 특파원들과 만나 “(미국은) 한·일 관계의 새 시대가 열리면 한·미·일 안보 협력이 업그레이드되고 나아가 한·미·일 협력이 보다 포괄적이고 풍부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논의 사안으로 한국의 핵심 수출 품목인 배터리·자동차·반도체 산업의 미래가 달린 반도체법(CHIPS Act)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 후속 시행 조치, 미국의 핵우산 신뢰 향상 방안을 거론했다. 모두 미국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안이다.

정부는 이날 강제징용 해법 발표를 모멘텀으로 한·일 정상회담(3월·도쿄)→한·미 정상회담(4월·워싱턴)→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기간 중 한·미·일 정상회담(5월·일본 히로시마) 개최 등 외교 일정을 짜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일본 교도통신은 윤 대통령이 16~17일쯤 일본을 방문해 기시다 총리와 회담하는 방향으로 조율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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