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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남규의 글로벌 머니

Fed 일방주의가 ‘제왕적 달러’ 강화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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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강남규 기자 중앙일보 기자
강남규 국제경제 선임기자

강남규 국제경제 선임기자

라구람 라잔(60) 미국 시카고대 교수(경제학)가 인도 중앙은행 총재로 근무하던 2014년 분통을 터뜨렸다. 상대는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벤 버냉키 의장이었다. 버냉키가 양적 완화(QE) 테이퍼링(규모 축소)을 내비치는 바람에 글로벌 자금시장이 요동한 게 화근이었다.

라잔은 당시 블룸버그 통신과 인터뷰하며 “Fed가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과 정책을 공조하는 데 실패했다”고 목청을 높였다. 라잔은 원인을 “미국의 자국 이기주의”이라고 했다. 경제학자 출신인 라잔의 진단은 사뭇 모호하다. ‘자국 이기주의’ 의미가 분명치 않아서다. 어떤 나라의 중앙은행이 자국 이기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뉴욕 연준의 이례적 보고서

Fed 일방적 긴축이 강달러 불러
세계 제조업 위축, 신흥국 큰 타격
미국 경제는 상대적으로 충격 작아
타국에 인플레 비용을 넘기는 꼴


Fed의 야전사령부 ‘뉴욕 연준’

제롬 파월

제롬 파월

그로부터 8년여가 흘렀다. Fed가 지난해 인플레이션 파이팅을 이유로 공격적으로 기준금리를 올렸다. 강(强) 달러 현상 때문에 미국을 제외한 나라들이 홍역을 치렀다. 아직도 Fed의 긴축 움직임만 엿보여도 달러 값은 뛴다. 사정이 이쯤 되면, Fed가 일방적으로 통화정책을 펼 수 있는 메커니즘이 더욱 궁금해진다. 하지만 ECB 등 다른 중앙은행 사람들은 “Fed 일방주의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할 뿐이다.

그런데 뜻밖의 기관이 체계적인 진단이 제시했다. 바로 ‘Fed의 야전사령부’인 뉴욕연방준비은행(뉴욕 연준)이다. 뉴욕 연준은 워싱턴 Fed가 결정한 통화정책을 월가를 통해 집행한다. 이런 뉴욕 Fed의 조사·분석팀이 최근 ‘달러의 제왕적 순환(The Dollar’s Imperial Circle)’이란 보고서를 내놓았다.

보고서 제목부터 심상찮다. 미국 쪽 이코노미스트들이 자주 쓰지 않는 제왕적 또는 제국적 의미를 지닌 영어 단어 ‘임페리얼(Imperial)’이 핵심어로 자리 잡고 있다. ‘달러의 제왕적 지위’ 나 ‘제왕적 달러’는 주로 미국 밖 이코노미스트들이 강달러 시대에 즐겨 썼던 단어다. 이런 표현을 Fed의 야전사령부가 보고서 본문이 아니라 제목으로 썼다. 놀라운 반전이다. 게다가 Fed의 일방주의가 가능한 메커니즘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글로벌 경제의 비대칭 구조

달러의 제왕적 순환

달러의 제왕적 순환

보고서를 쓴 오즈게 아킨치 등은 Fed 일방주의가 가능한 이유로 두 가지 비대칭을 꼽았다. 첫 번째는 글로벌 금융시스템 안에서 쓰이는 달러 규모가 미 경제 규모보다 훨씬 큰 비대칭이다. 미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GDP의 30%도 채 되지 않는다. 또 미 수출입은 글로벌 교역의 10% 남짓이다. 반면 달러는 세계 외환보유액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국제 자금대출의 50%가 달러로 이뤄진다. 국제무역의 필수인 신용장의 절반도 달러를 바탕으로 교환된다.

두 번째 비대칭은 미국의 수출입이 글로벌 교역의 침체 등에 덜 타격받는 구조다. 예를 들어 유로존이나 중국 등의 경제에서 국제교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최근 50년 사이에 꾸준히 늘어났다. 반면 미국 경제에서 수출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아킨치 등은 “(Fed의 일방적 긴축으로) 달러 가치가 급등해 글로벌 교역이 위축되면 유럽이나 중국, 기타 신흥국 등이 크게 충격받는다”며 “미국은 두 가지 비대칭 구조 때문에 국제교역이 위축돼도 상대적으로 덜 힘들다”고 설명했다.

비대칭과 달러의 제왕적 지위

뉴욕 연준 리서치팀의 독립성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아킨치 등은 한 걸음 더 나간다.  두 가지 비대칭이 달러의 제왕적 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고 했다. 그 순환의 첫 단추는 Fed의 통화긴축이다. Fed가 (다른 나라 중앙은행과 공조 없이) 긴축하고 나서면, 달러 가치가 상승한다. 실제로 지난해 강달러의 핵심 요인이 주요 중앙은행 사이 긴축 시간차였다.

달러 강세는 글로벌 제조업 위축을 야기한다. 특히 신흥국이 더 큰 타격을 받는다. 신흥국 기업들이 강달러 때문에 자금조달에 애를 먹고, 원자재 도입도 달러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원자재 수요가 줄면서 가격도 하락한다. 구리 등을 주로 채굴해 공급하는 신흥국 경제도 위축된다.

미 경제도 영향을 받기는 한다. 글로벌 제조업과 교역이 위축되는 바람에 미국산 제품의 수요도 줄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받는다는 게 아킨치 등의 분석이다. 무엇보다 아킨치 등은 “미국이 글로벌 경제 상황에 상대적으로 덜 노출된 조건에서 글로벌 제조업과 교역 위축이 달러가 더 강세를 띠는 현상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Fed의 지난해 긴축 여파로 미국보다 다른 나라 경제가 더 어려워지고 있다. 반면, 미 경제는 고금리 처방에 어울리지 않게 탄탄하다. 그 바람에 Fed가 결정하는 기준금리의 최종치가 5% 중반에 이를 수 있다는 전망마저 다시 제기되고 있다. 그렇다면 신흥국을 힘들게 하는 달러의 제왕적 순환이 상당 기간 이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