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누군가 해야한다면 지금 내가"…'물 반컵' 먼저 채운 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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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진 외교부 장관은 6일 제3자 변제에 해당하는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의 공식 발표했다. 현재로선 일본 기업의 참여 없이 한일 청구권 협정의 수혜를 입은 한국 기업 주도로 배상금이 대신 지급될 것으로 보인다. 뉴스1

박진 외교부 장관은 6일 제3자 변제에 해당하는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의 공식 발표했다. 현재로선 일본 기업의 참여 없이 한일 청구권 협정의 수혜를 입은 한국 기업 주도로 배상금이 대신 지급될 것으로 보인다. 뉴스1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를 둘러싼 20여년간의 법적 갈등이 일단락됐다.

정부가 6일 발표한 강제징용 해법은 피해자와 일본 피고 기업(미쓰비시중공업·일본제철) 사이의 민사 분쟁을 외교적으로 우회하는 방식이다. 2018년 3건의 대법원 판결에 따라 이들 일본 피고 기업이 강제징용 피해자 15명에게 지급해야 할 손해배상금(지연이자 포함 1인당 약 2억~2억 5000만원)을 제3자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사장 심규선, 이하 지원재단)이 대신 변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이를 “우리의 주도적이고 대승적인 결단”이자 “피해자들을 위한 실질적 대안”이라고 표현했다.

정부가 사법·외교·정치 등 각 분야의 쟁점과 갈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윤석열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윤 대통령은 주변 참모들이 강제징용 해법에 따른 정치적 리스크를 우려할 때마다 같은 대답을 했다고 한다. “언젠가 해야 하고, 누군가 해야 한다면 지금 내가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이 피고 기업의 배상 참여 문제에 대해 협상 막판까지 부정적 입장을 고수하는 상황에서도 윤 대통령은 대승적 결단과 속도전을 주문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다만 결과적으로 이번 징용 해법은 논의 시작과 협상, 결과 발표 모두 한국 정부가 알아서 주도한 모양새가 됐다. 우선 해법의 핵심인 제3자 변제를 위한 재원은 포스코 등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의 수혜를 입은 한국 기업·공공기관 출연금이 주축일 전망이다. 현재로썬 일본의 호응 조치는 “(식민 지배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담은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 등 역대 내각의 인식을 전체적으로 계승한다는 입장 발표가 전부다. 한국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일본 경제단체연합회(經團連·게이단렌)이 뜻을 모아 미래 세대 사업을 위한 기금을 조성할 방침으로 전해졌지만, 이 역시 한·일 우호 협력 사업일 뿐 강제징용 해법의 본질은 아니다.

①‘최대공약수’ 해법이 남긴 과제들

정부는 국내 의견 수렴 및 대일(對日) 협상 초기부터 ‘최대공약수 해법’을 염두에 뒀다. 해법의 우선 적용 대상이 될 15명의 피해자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더라도 최대 다수가 수용할 수 있는 해법을 도출하겠다는 취지였다. 다만 일본 피고 기업의 직접 배상과 사죄를 요구하며 제3자 변제안을 거부하는 피해자의 의견 역시 충실히 들었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28일 강제징용 피해자 및 유족과 면담을 가졌다. 외교부 제공

박진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28일 강제징용 피해자 및 유족과 면담을 가졌다. 외교부 제공

박진 장관이 조속한 해법 발표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지난달 28일 강제징용 피해자·유족과의 집단 면담 자리였다고 한다. 이 자리에선 일본 피고 기업이 아닌 지원재단이 배상금을 지급하는 방안에 대한 여러 의견이 쏟아졌다. 일본에게 면죄부를 준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상당수 피해자는 출처와 관계없이 빠른 배상을 원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한 피해자 유족은 면담을 통해 “징용 피해를 당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3세에게 대물림할 순 없다”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고 한다. 현재 대법원 판결을 통해 승소한 피해자 15명 중 생존자는 3명(양금덕·김성주·이춘식) 뿐이다.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문재인 정부 시절 대법원이 기존 청구권 협정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정반대 판결을 하는 바람에 우리가 문제를 만들어 놓고, 우리가 해결하는 멋쩍은 상황이 돼 버렸다"며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봉합해야 한다는 정치적 결단으로 봐야 한다"고 전했다.

②사법정의와 절반의 물컵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는 6일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발표한 제3자변제 해법을 규탄했다. 뉴스1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는 6일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발표한 제3자변제 해법을 규탄했다. 뉴스1

정부의 딜레마는 2018년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면서도 이를 우회하는 해법을 추진해야 한다는 데 있다. 물론 정부가 발표한 제3자 변제안으로 돈의 출처와 관계없이 가능한 빨리 배상금을 수령하겠다는 입장을 가진 피해자들의 요구 조건을 해결할 발판이 마련됐다. 하지만 양금덕 할머니 등 일본 피고 기업의 직접 배상과 사죄를 요구하는 피해자 입장에서 이번 해법은 사법 정의 실현과 거리가 멀다. 양금덕 할머니는 이날 정부 해법에 대해 “동냥처럼 주는 돈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정부가 징용 문제의 해법으로 꺼내 든 제3자 변제안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진통이 본격화할 전망이다. 대신 배상금을 지급하겠다는 지원재단과 이를 받지 않겠다는 피해자 간의 입장차가 평행선을 달리면 해법의 완결성 자체에 대한 의문이 커질 우려도 있다. 한국-일본 간 신경전이 이제는 한국 내의 다툼 양상으로 새롭게 전개될 수 있다.

정부의 강제징용 해법 발표에 대해 일본 측은 김대중-오부치 선언 등 과거 일본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는 원론적 입장을 발표했다. 이외에 일본 피고 기업의 배상 참여는 못박지 않았다. 사진은 지난달 19일 뮌헨안보회의를 계기로 한 한일 외교장관 회담 당시 인사를 나누는 박진 외교부 장관과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 뉴스1

정부의 강제징용 해법 발표에 대해 일본 측은 김대중-오부치 선언 등 과거 일본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는 원론적 입장을 발표했다. 이외에 일본 피고 기업의 배상 참여는 못박지 않았다. 사진은 지난달 19일 뮌헨안보회의를 계기로 한 한일 외교장관 회담 당시 인사를 나누는 박진 외교부 장관과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 뉴스1

박진 장관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이번 해법으로) 물컵에 비유하면 물이 절반 이상은 찼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어질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에 따라 그 물컵은 더 채워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물컵을 마저 채울 수 있을지, 끝까지 절반에 그칠지 온전히 일본의 결정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피고 기업의 배상 참여 등 일본의 추가적인 호응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일본과의 협상에서 도대체 뭘 얻었나"란 비판이 거세질 수밖에 없다. '신속 결단'이 '졸속 오판'으로 둔갑할 수 있는 상황이다. 실제 이날 한국의 해법 발표 이후 일본 정부나 피고 기업들이 취한 조치를 보면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게 끝났다"는 기존 입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일본의 추가적인 호응을 낙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과거사 문제를 해결해 한·일 양국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선 가해자와 피해자의 협력이 중요하다”며 “그런 차원에서 일본이 보다 적극적인 호응과 전향적 조치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③‘불완전 연소’의 불씨

정부가 발표한 강제징용 해법인 제3자 변제안은 대법원 판결을 통해 승소한 15명의 강제징용 피해자가 모두 배상금을 수령해야 그 절차가 종결된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캄보디아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당시 악수를 나누는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대통령실 제공

정부가 발표한 강제징용 해법인 제3자 변제안은 대법원 판결을 통해 승소한 15명의 강제징용 피해자가 모두 배상금을 수령해야 그 절차가 종결된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캄보디아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당시 악수를 나누는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대통령실 제공

제3자 변제라는 해법이 강제징용 문제의 해결이라는 ‘완전 연소’로 이어지기 위해선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확정판결을 받은 15명의 피해자 전원이 지원재단에서 지급하는 배상금을 수령해야 한다. 일부 피해자가 끝내 수령하지 않는 경우 최소한 법원 공탁 등의 절차를 통해 법률적으로라도 배상 절차를 마무리해야 한다.  

문제는 일부 피해자가 배상금 수령은 물론 법원 공탁에도 반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피해자 측 법률대리인단은 정부가 공탁에 나설 경우를 상정해 공탁 무효소송 등 추가적인 법적 대응을 검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외교부 고위당국자는 이날 “법리적으로는 (피해자들이) 끝까지 판결금을 수령하지 않는 경우 공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알고 있다”면서도 “다만 한 분이라도 빠지지 않고 판결금을 수령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게 현재 정부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구상권도 징용 해법의 완결성을 위협하는 불씨가 될 수 있다. 실제 구상권을 청구할 경우 일본 피고 기업은 또 다시 배상금을 지급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며 문제가 원점으로 회귀한다. 피해자와 일본 피고 기업 간의 민사 분쟁이 지원재단과 일본 피고 기업 간의 갈등으로 이전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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